[책과 길] 고난의 사행길 마다않던 조선통신사는 원조 ‘한류’

입력 2012-10-25 18:16


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김경숙/이순

“이날 파도는 좌수포에 비해 열 배는 더 위험하고 나빴다. 그러나 나는 저녁 내내 어지럽지 않았으니, 이는 키 위쪽에 나와 앉아 눈으로 파도의 위세를 지켜본 덕택이다. 죽고 사는 것에 이르렀을 때 처음에 맡겨버리면 다시는 두려워할 바가 없다.”(54쪽)

1763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 일행 가운데 부사(副使) 서기 원중거(1719∼1790)가 쓴 사행(使行)기록 ‘승사록’의 일부다. 부사는 정사(正使)를 돕는 사신이다. 쓰시마를 출발해 가쓰모토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났을 때, 그 절체절명의 심정을 적은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1592∼1598) 후 일본에 파견된 사신이자 문화사절단이다. 1607년에서 1811년까지 총 12차례의 사행이 있었는데, 한 번 사행에 동원된 인원은 무려 470여명. 사신을 필두로 군관, 통역사, 문사, 화원, 의원, 요리사, 악단 등 다종다양한 대인원이 한양을 출발해 부산에 도착한 후 6척 배에 나눠 타고 일본으로 향한다. 바다를 건너 쓰시마에 잠시 정박한 후 아카마가세키(지금의 시모노세키)를 위시한 각 지역을 지나 오사카에 상륙한다. 이후 육로를 통해 교토와 나고야를 거쳐 에도(지금의 도쿄)에 이르렀다. 부산에서 에도까지 왕복 9∼11개월이 걸리는 긴긴 여정이었다.

중국 사행길이 육로였던 것과 달리, 일본 사행은 해로를 거쳐야만 해 위험했다. 원중거의 글은 통신사 일행이 직면했던 숱한 위험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사대부들은 일본 사행을 꺼렸다. 하지만 신분적으로 열세에 있던 서얼이나 중인들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통신사를 다룬 책들은 있었으나 대외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고전연구가인 저자는 기존 연구가 간과한 부분, 즉 조선통신사의 일상생활과 문화 교류에 그물을 던진다. 수백 명이 1년 동안 이국에서 동고동락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누군가의 생일은 반드시 있었을 텐데 향수는 어떻게 달랬을까. 문화 교류를 했다는데 시와 글씨는 어떻게 주고받았을까….

그렇게 해서 건져낸 이야기의 그물망은 촘촘하다. 1부에선 사행원들의 생활이, 2부에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일본 문화와 문화적 교류가 풍부한 사례를 통해 제시된다.

“사로잡혀온 여인 세 명이 좌화산에서 왔는데, 모두 전라도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양반의 딸인데, 정유년에 여덟 살의 나이로 사로잡혀 이곳에 왔다. 딸 하나를 낳아 지금 열네 살이 되었는데, 같이 데리고 나왔다. 이날은 내 생일이다. 이역에 와서 이날을 만나니, 더욱 고향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120쪽)

1624년 통신사로 간 부사 강홍중이 쓴 ‘동사록’의 일부다. 마침 이국에서 맞는 자신의 생일에 남루한 차림의 조선 포로를 본 씁쓸한 감흥을 소략하게 적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세 번째 사행, 따라서 포로를 돌려받는 게 최대 목적이던 때였다. 타국에서 노비보다 못한 생활을 하던 포로 중 일부가 돌아오지만, 조정의 무관심으로 방치된다. 강홍중은 ‘동사록’의 다른 글에서 “이들이 본토로 돌아와서 낭패한 정상을 듣는다면, 이 뒤에는 비록 쇄환하려 해도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개탄한다.

사행길이 고난과 고생만 있는 건 아니다. 그곳에서도 이국의 풍물과 문화적 충격이 주는 즐거움이 있었다.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이국의 명절을 함께 나누고, 그곳의 자랑인 고래잡이를 구경했다. 미인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중거는 오사카, 교토, 나고야, 에도 등 주요 도시 여인들을 비교해 평가하기도 한다.

조선통신사 행렬은 당시 일본에 ‘한류’ 바람을 일으켰다. 문사들은 일본의 지식인들과 함께 모여 시문창화(詩文唱和·남의 시의 운에 맞추어 시를 짓고 서로 주고받음)를 많이 했다. 양국의 교류는 처음에는 글씨나 그림 중심이었는데 일본의 일반 백성들까지 조선 문사의 시문이나 글씨를 열망했다. 오사카에서 머물 때 시문을 창화하고 에도에 갔다가 한 달 만에 다시 오사카로 돌아왔더니 그 시문들이 이미 책으로 엮여 발행돼 나았다는 기록도 있다. 교류 분야는 학문과 시서화뿐 아니라 음악 의약 기예 등 다양했다.

조선통신사의 목적은 일본의 재침 의도를 살피는 데서 출발해 점차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오랑캐 나라’를 덕과 문화로 교화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실패했다는 인식 탓인가. 조선통신사의 일상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온 측면이 있다. 이 책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조선통신사들에 바치는 헌사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