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 언어로 말한다 누가 뭐래도… 4차원에서 ‘개념녀’로 탈바꿈 팝아티스트 낸시랭
입력 2012-10-24 19:20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 22일 낮 서울 신당동 한 극단 연습실. 팝 아티스트 낸시랭(33)은 예의 어깨한쪽에 고양이 인형 한 마리를 걸치고 나왔다. 빅토리아 시대 풍 보랏빛 우산, 미니스커트를 입은 화려한 의상, 깊이 패인 가슴골. 가을비 탓에 기온이 떨어져 머플러를 한 것이 ‘멋쩍음’을 완화했으나 카메라 앞에 서자 머플러를 선뜻 풀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익숙한 사진 모델처럼 알아서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했다. 빠른 셔터 음이 그녀에겐 음악처럼 들리는지 갈수록 경쾌해졌다. 오그라들게 하는 고양이 소리 ‘앙’도 소리 내면서 말이다. 사진을 찍던 커피숍 앞 건너편 단독주택 아주머니는 이런 구경거리를 혼자 보는 것이 아까운 듯 스마트폰 문자를 연신 날렸다.
낸시랭. ‘다른 멘탈(mental)의 소유자’.
우리에게 비쳐진 그녀의 일반적인 이미지다. 란제리 패션으로 주목을 끌고, 비키니 의상으로 국회 앞에서 투표 독려를 하는 등의 행위예술로 입방아에 오른다. 대개의 네티즌은 “낸시랭 미쳤나요?”라는 질문도 서슴지 않는데, 되레 그녀는 “소통되길 원해요. 욕이든 칭찬이든 행위와 작품이 거론되는 것은 소통이잖아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한다. ‘한 방’에 보내는 그녀만의 언어에 웬만한 전사급 스타나 정치인들 ‘올킬’ 당한다. 출발점부터 다른 멘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낸시랭은 요즘 엔터테이너에 가깝다. 인기 TV 프로그램 ‘강심장’, 라디오 ‘김영철의 펀펀 투데이’, 종합편성채널 ‘속사정’ 등에 출연하고 홈쇼핑채널에서 속옷을 팔기도 하는 등 미디어장르를 다각도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팝 아트가 어차피 미디어를 하나의 소재로 삼기 때문에 구분되어질 일도 아니고 어색한 결합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일약 스타’가 되기 위해 근본 없이 ‘노출’한 것은 아니다. 홍익대에서 서양화로 학·석사를 마친 정통 작가다. 2001년부터 매년 개인전도 끊이지 않고 해왔다. 올해도 12월 대통령선거 한 주 앞서 청와대 앞 갤러리에서 선거를 빗댄 페인팅을 내건다. 또 26일부터 내년 1월 중순까지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통해 연극 배우로 처음 도전한다. 이 연극은 성폭력 현상과 같은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여느 무대보다 분위기가 다를 것이라고 한다. 아티스트라는 자유로운 영혼이 갖는 ‘실험과 도전’은 계속되는 셈이다.
“제가 쉽게 생각한 것 같아요. 두세 가지를 병행하는 게 아닌데 말이죠.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대사가 참 길어요. 외우는 것과의 전쟁이죠. 탤런트 김세아 임성민씨 등과 더블 출연하는데 공연 초기엔 제 무대가 집중돼 있어요. 호흡 조절, 정확한 동선, 각본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 등 만만찮은 장르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개인전과 방송 등을 준비해야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죠.”
그녀는 요즘 차분해졌다. 아니 어느 시점 이후 그렇게 비쳐진다. 악플러들조차 선플러로 돌아섰다. 지난 2일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강심장’(SBS TV) 출연 이후의 일이다. 17년간 암투병하던 어머니와의 이별을 이야기하면서 시청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무남독녀인 그가 “엄마, 우리 같이 죽자”라고 했었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자연인 낸시랭을 보았다.
연예인들이 자주 쓰는 ‘감동마케팅’을 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꺼낼까 했다. 한데 거둬들였다. 그녀는 2009년 별세한 모친 얘기를 그제야 했기 때문이다. 사업가 여장부 엄마를 둔 ‘엄친딸’인 그녀는 청소년기에 유학을 했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단다.
“아버진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긴 병에 남아나는 재산이 있을 리 없죠. 그리고 저희 부모님이 제게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셨으면 저라도 뛰어들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를 살리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 않으셨거든요.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비키니 퍼포먼스는 고기 잡는 법을 몰랐던 내게 도망치고 싶은 현실의 발로였어요.”
낸시랭은 그 퍼포먼스로 ‘스타’가 됐다. 그런 딸을 보는 어머니의 당시 심정을 물었다.
“예술을 이해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란제리 입은 딸을 이해 못 할 리 없지요. 어느 부모건, 자식이 하는 장르가 어떠냐를 떠나 자식 자체를 믿고 싶어 하잖아요.”
그녀는 “죽음은 늘 나와 함께 있었다”고 했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는 그래서 수반됐다. 새벽기도를 빼놓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8월 18일 15년을 같이 산 애완견 폴마저도 죽었다. 그녀는 주검 옆에서 슬퍼하는 자신의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 ‘주검 가지고도 쇼하냐’는 비난을 샀다. 검색어 실시간 1위였다.
“저는 기억과 망각의 삶을 사는 유한한 인간이고,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아 기록해요. 엄마·아빠, 외할머니를 기억하고 폴을 기억해요. 기록 없이 아티스트가 될 수 없고요. 내 언어로 말해요. 엄마는 평범한 삶을 원했지만요.”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