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10월유신 40주년
입력 2012-10-24 19:16
그해, 1972년 고교 입시준비는 엉망이 됐다. 10월 17일 정부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새 헌법을 내놓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바로 ‘10월유신’의 시작이다. 중3 까까머리 입장에서도 웬 날벼락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간선제로 바뀌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등 정치체제가 근본적으로 달라졌으니 이전의 사회과목 지식은 무용지물이 됐다. 그달 27일 발표된 유신헌법에 근거한 참고서를 익히느라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새롭다.
10월유신의 주역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의 당위성으로 평화적 통일 대비,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꼽았다. 하지만 유신이란 말을 ‘메이지유신’에서 빌려온 것만 봐도 한국적 운운하는 것은 웃음거리다. 어디로 보나 영구독재체제 구축일 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군사쿠데타 직후 적절한 시점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했지만 말뿐이었고 심지어 3선 개헌을 통해 71년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했다. 그는 대선 유세 중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었다. 허언의 연속인 셈이다.
민중의 저항도 시작됐다. 73년 봄 남산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기독교계는 ‘민주주의 부활, 독재타도’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긴급조치를 발동해 압박을 가했으나 그해 가을부터 ‘유신반대·독재타도’ 운동은 더욱 확산됐다. 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대대적인 시위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64년 대북 공안사건으로 처벌한 적 있는 인민혁명당(인혁당)의 재건파를 지목하고 관련자 23명을 4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그중 8명은 사형선고를 받고,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18시간 만인 75년 4월 9일 형이 집행됐다. 이른바 2차 인혁당사건이다.
그악스럽던 유신독재는 박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쓰러진 후 막을 내렸다. 이어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을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발표했고, 유족들의 재심 청구 끝에 법원은 사형이 집행된 8명에게 2007년 1월 23일 무죄를 선고했다.
10월유신 40주년을 맞는 올 겨울 18대 대선이 펼쳐진다. 마침 박 대통령의 딸 근혜씨가 여당 후보로 맹활약 중이다. 민주주의 하에서 아버지와 딸이 같을 수 없고 아버지의 공과를 딸이 끌어안아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박 후보도 한국민주화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유신독재의 실체를 모른 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