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공탁금-이제는 돌려 받아야 한다] 미쓰이 “임금 부쳐주겠다”… 67년 흘렀지만 무소식

입력 2012-10-24 21:47


3회 : 몰염치 일본 전범 기업들의 공탁금 떼어먹기

전북 정읍에 사는 김의규(87) 할아버지는 18세 때인 1943년 일본 홋카이도 비바이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 탄광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대표적 전범(戰犯)기업 미쓰이가 운영한 곳으로 41년 탄광 폭발사고로 32명의 조선인 강제동원 노무자가 사망했다. 김 할아버지는 2년6개월 동안 탄을 캤다. 갱도에 들어가면 어둡고 시계도 없어 하루에 몇 시간씩 일했는지도 몰랐다. 항상 배고프고 잠이 부족했다. 해방이 되자 미쓰이 측은 여비 한 푼 없이 “집에 가면 그동안의 임금을 부쳐주겠다”며 부산행 미국 군함에 김 할아버지를 태웠다. 그리고 67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방 왜놈들한테 돈 한 푼 받은 게 없당게. 애국저금이다 머다 해 놓고 통장도 안 줬어.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여.” 김 할아버지는 2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3대 전범기업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탄광, 군수공장 등 245곳의 강제작업장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진상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 작업장의 환경은 타 작업장보다 더욱 열악했다.

스미토모가 운영한 구리 광산인 벳시 광산은 41년 12월 21일 배치된 조선인 노무자 242명 중 28명(11.6%)을 배치된 지 3개월 만에 작업 불능자로 분류했다. 비위생적 환경과 강도 높은 노동을 못 이겨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조선소에 동원된 조선인은 원자폭탄 피해도 입었다. 일본 정부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인 노무자 수는 1903명이다. 이 가운데 원폭 피해자 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미쓰비시가 원폭 투하 직후 일본인 사원에 대해 임시휴가 조치를 취한 반면 조선인 노무자는 공장에 방치한 점, 조선인 숙소가 급조한 목조건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피해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동원됐던 246명의 조선인은 45년 9월 15일 귀국길에 올랐다가 태풍을 만나 모두 사망했다.

미쓰이의 미이케 탄광의 조선인 노무자 숙소 10곳은 말을 타지 않고는 도저히 다닐 수 없는 진흙탕 길이란 뜻인 ‘마도(馬渡)’로 불렸을 정도다.

정부는 3대 전범기업 작업장에서 일한 강제동원 피해자를 20만∼3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최종본이라고 우리 정부에 제공한 ‘조선인 노무자 공탁기록’에 따르면 공탁금이 있는 인원은 1만896명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확인된 245곳의 강제동원 작업장 중에서 공탁금 명부가 존재하는 곳도 20곳뿐이다.

3대 전범기업은 현재도 일본의 주요 재벌로 꼽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동원 노무자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몸집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미쓰비시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후원금을 제공하는 등 이들 기업은 과거사 반성보다는 우익 성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