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공탁금-이제는 돌려 받아야 한다] 日人들 “미쓰비시, 배상금 지불하라” 양심의 소리
입력 2012-10-24 21:47
3회 : 몰염치 일본 전범 기업들의 공탁금 떼어먹기
아카츠카 가즈오(68)씨는 매주 목요일 외박을 한다. 다음 날 오전 6시20분 나고야역 인근 여관에서 나와 1만엔(약 14만원)을 내고 도쿄로 가는 신칸센을 탄다. 목적지인 시나가와역에 내리면 오전 8시. 5년째 아카츠카씨의 일상이다.
지난 19일 오전 8시30분. 한국의 신도림역만큼 붐비는 시나가와역 앞에서 그가 주섬주섬 전단을 꺼내 돌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 동안 쉼 없이 돌려도 30∼40장 돌릴까 말까 했다. 전단을 받는 행인은 100명에 1명도 되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카츠카씨에게 외박에 대해 물었다.
“나고야역에서 집까지 꽤 멀어요. 늦으면 안 되잖아요.”
그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2000여명 회원 중 한 명이다. 9시30분이 되자 아카츠카씨를 포함한 10여명의 회원들은 300m 거리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으로 이동했다. 플래카드를 걸고 다시 2시간 동안 그는 전단을 돌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모리 히로유키(67)씨가 약국에 간다고 자리를 비웠다. 협심증을 앓고 있는 모리씨가 가슴 통증을 호소한 것이다. 그래도 전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미쓰비시중공업은 강제연행 당장 인정하라, 배상금 당장 지불하라”는 외침은 계속됐다.
12시30분 근처 덮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하나둘 입을 열었다. 데라오 데루미(77·나고야공대 명예교수) 공동회장은 “(집회는) 애국심 때문에 한다. 일본 정부와 기업의 잘못을 일깨워주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교도통신 사진기자 출신 신도 겐이치(69)씨는 “매주 사진을 찍는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미안함을 갚는 유일한 길”이라며 웃었다. 고교 교사 출신 모리씨는 “할머니들이 법원에서 패소해 통곡할 때 같이 울었다. 미안해서 울었다”고 했다. 1944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제작소에서 일하던 13∼15세 조선 소녀 300여명 중 6명이 지진으로 숨진 일도 있다. 1시30분 갹출로 밥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167회차 ‘도쿄 금요행동’ 집회는 끝났다. 다카하시 마코토(70) 공동회장이 “꿈은 이뤄진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지원회는 2007년 7월 20일 첫 집회를 열었다. 나고야에서 도쿄까지 왕복 700㎞가 넘는 거리를 오가며 한 주도 빠짐없이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2010년 7월부터 2년간 있었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피해배상 협상 중에는 ‘휴전’을 했지만 협상이 결렬되자 바로 다음 주 집회를 재개했다.
도쿄=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