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규태 (3) “췌장암 극복하려면 文筆 대신 畵筆을 드세요”
입력 2012-10-23 21:02
내가 췌장암 수술을 받은 곳은 모교인 연세의료원이 아니라 삼성의료원이었다. 그런 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무렵 ‘삶과 꿈’이라는 잡지에 ‘한국의 얼굴’이라는 연재 인터뷰 기사를 맡고 있었다. 우리나라 각계의 대표적인 인물을 만나 대담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삼성의료원이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원장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의료원에서는 공식적으로 개업병원의 홍보비라고 금일봉을 내게 건네주었다. 이를 굳이 사양했더니 그러면 언제든지 건강검진을 해주겠다며 아무 때나 쉴 겸 입원을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파산 후 종합병원에 입원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염치불구하고 이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개복수술 후 암세포가 비장 등 다른 장기에 전이되었기 때문에 회생이 어려우니 그냥 덮어버려야겠다는 집도의의 설명을 듣고도 원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차례나 마취를 하며 가까스로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또한 전담 간호사가 늘 곁에 있었는데도 입원 중 방귀 배출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물을 마시는 바람에 복수가 차올라 죽음의 고비를 다시 한번 넘길 때도 겨우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달 남짓 만에 가까스로 퇴원했다.
그때 가족들에게는 길어야 석 달쯤 될 거라고 알리면서 환자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 하고 싶어했던 것을 최대한 누리게 해 주라고 병원 측이 누누이 당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치의는 나에게 그런 ‘최후통첩’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병실에서 메모하던 파커 만년필을 달라고 하더니, 앞으로는 글을 쓰지 말라는 지시 겸 당부를 하였다. “상징적인 의미로 이걸 압류하겠다”고 주치의는 말했다.
그밖에 내가 지켜야 할 금기사항도 상징적으로 외우기 쉽게 ‘3S’와 ’7시옷(ㅅ)’으로 일러주었다. 의사가 금기한 3S는 ‘스트레스·섹스·스크린’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특히 스트레스는 사람이 주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스트레스는 가까운 사람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살아오던 고장을 떠나는 게 좋고, 가능하면 외국 여행을 하며 지내면 더욱 좋겠다고 권했다.
퇴원 때 나는 주치의에게 금기사항을 지키다 보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주치의는 그 차선책으로 글쓰기 대신 화필을 들어보라고 권했다. 문필과 화필이 뭐가 다르냐고 물었더니 문인이 붓을 든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일으키게 마련이지만, 화가가 아닌 사람이 재미삼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미술치료법’임을 일러 주었다. 그 권유를 받아들여 나는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 수술비와 입원비를 지불하고 남은 돈으로 십여년 동안 세계를 돌며 스케치 여행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이태 전에야 문득 태어난 땅, 묻힐 땅으로 돌아오고 싶어졌다. 우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 그런데 귀국한 지 2주일 만에 그동안 살고 있던 호주의 내 거처가 큰 산불로 소실되어 이내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망연자실한 나머지 출판사 친구를 찾아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는 무척이나 나를 반기면서 살던 집을 태워버린 것은 귀국하여 여생을 고국에서 보내라는 주님의 뜻이니 어렵더라도 눌러 살라면서 귀국을 알리기 위해 시집을 출판하자고 권했다.
그동안 절필이 불가피했고, 대신 그림만 그려왔다고 했더니,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는 이제라도 시정(詩情)을 떠올려 시를 써 시화집을 내보자고 제의했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길 너머의 그리움’이란 제목으로 원고를 마무리했다. 그 시집의 출간과 더불어 나의 생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편집부에서 제목은 출판사에 맡겨달라고 해서 위임했더니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따온 것 같은 제목으로 책이 나왔다. 그 제목 덕(?)에 초판이 매진되었다니 부끄러운 대로 참기로 했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