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지형은] 신학이 희망이다
입력 2012-10-23 18:35
“진리를 사랑하고 열망하며 진리를 밝게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주제들에 대하여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토론하기를 제안합니다. 존경하는 사제 마르틴 루터를 좌장으로 하여 이 대학교의 학부생과 신학석사 과정 학생들 그리고 관련된 교수들이 토론할 것입니다. 참석할 수 없거나 구두로 토론할 상황이 안 되는 사람들은 서면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고합니다. 아멘.”
1517년 비텐베르크성교회의 정문에 나붙은 이른바 ‘95개 논제’의 가장 처음 부분이다. 여기에 바로 1번 항목부터 이어진다. “1. 우리 주님이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회개하라!’(마태복음 4:17). 이 말씀에 담긴 뜻은, 믿는 사람들의 삶 전체가 회개여야 한다는 것이다. 2. 이 말씀을 성례전의 회개로 이해하면 안 된다. 성직자의 제도적인 직무를 통해서 진행되는 그런 회개, 말하자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정해주는 속죄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죄의 용서가 완성된다는 그런 종교 형식의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3.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회개가 그저 내적인 것은 아니다. 내적인 회개가 육체의 죄악을 철저히 죽임으로써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런 내적인 회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세상을 바꾼 루터의 95개 논제
수도사며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수인 마르틴 루터가 내건 95개 논제 전체는 각 항목의 길이가 이 정도다. 논제는 원래 학문적인 토론을 겨냥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글이 아주 빠르게 독일 전역으로 퍼졌고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다. 당시 세계의 구조를 뒤엎은 초대형 지진이 되었다!한 신학자의 짧은 글이 어떻게 시대 전체를 변혁시키는 에너지로 분출되었을까.
까닭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 즈음 교회의 타락이 아주 심했다. 공분(公憤)이 차오를 대로 차올라 있었다. 둘째, 루터의 글이 그런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찔러 들어갔는데 루터에게는 신학과 신앙이 하나였다. 신학은 온 삶을 던지는 사유였고 교회의 현실을 부둥켜안고 사는 것이었다. 신학이 곧 신앙의 삶이었다. 또 신앙은 삶의 장식품 같은 게 결코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루터에게 신앙의 언어는 깊고 치열했다. 신앙의 표현이 곧 신학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가 내걸리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5년 뒤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다. 지금 한국 교회는 어디쯤 와있는가? 회복되고 있는가, 더 병들어 가는가? 하늘나라에 가신 옥한흠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침몰하고 있는 중’인가?
한국 교회가 개혁돼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천년 동안 교회가 역사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낸 것은 교회가 늘 개혁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론의 중요한 명제 중 하나가 ‘늘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다. 교회 개혁에서 ‘신학이 희망이다’. 한국 교계에서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설문조사를 해도 그렇게 나온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보면 명확하다. 교회 갱신의 근본 축은 신학일 수밖에 없다. 교회 역사적으로 늘 그랬다.
신학자가 치열하게 발언해야
루터를 생각하며 신학자들에게 묻는다. 오늘날의 교회 상황에 대하여 신학자들이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혈연과 지연에 휘둘려 세습하고 분열하며, 돈과 권력을 좇느라 복음의 사랑과 공의를 잃어버린 상황에 대해 비장하게 글 쓰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애쓰는 신학자들이 있는 걸 안다. 그러나 단지 교수로서 교과부의 요청을 채우려는 것 말고, 교회를 온 몸으로 끌어안고 더 치열하게 그리고 전략적으로 말해야 한다. 신학자와 현장 교회는 같은 배에 타고 있다. 종종 보게 되는, 한국을 방문하는 서구 신학자들의 초라한 모습은 남 얘기가 아니다.
지형은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