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의 시편] 노크

입력 2012-10-23 21:01


북한군인이 귀순한 사건으로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휴전선을 넘어 우리군 생활관 문을 노크한 황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웃을 수 없는 ‘노크귀순’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경계근무를 철저히 한다는 우리군은 아무도 몰랐고, 또 절박한 심정으로 귀순을 시도한 북한군 병사의 안전한 귀순을 도와 줄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경계실패요, 군 기강 해이의 전형입니다.

이렇게 떠들썩한 중에 교회로 생각이 옮겨갔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잘 살피는가. 세상의 노크에 귀를 기울이는가.’ 누군가 상처를 입고 도피처를 찾고 있을 때 이리 오라고, 우리가 도울 수 있다고 달려가 손 내미는지요.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눈을 뜨고 살피고 있는 걸까요. 또 세상 어디보다 그래도 기독교가 좋을 것 같아 교회를 찾아와 문을 노크할 때 우리는 과연 문을 열어주고 영접할 준비는 되어 있는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교회는 아닌지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누군가 확인한 후 귀찮아하며 돌아서 버리는 교회는 아닌지요.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는 세상이 기대하는 것보다 교회가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세상을 위한 교회이기보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아닌가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찾아오기엔 둘러 친 철책이 너무 높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방황하며 도움의 손길을 찾는 이들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손잡아 줄 수 있다면 교회는 세상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셨지요. 방황하는 죄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눈치 보며 나를 만나 주시기나 할까 싶은데 어느새 옆에 계셨고 누구도 스치기 싫어하는 자들의 몸에 손을 대주셨습니다. 노크를 하기 전에 이미 곁에 가 주셨습니다. 노크하는 사람은 그냥 와락 안아주셨지요. 그래서 거룩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눈에서는 벗어나고 말았지요.

학비를 내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지역 학생들을 위해 성탄절 헌금 전부를 쓰는데 기꺼이 동의하는 교인들이 그런 모습을 닮은 것 같아 늘 고맙습니다. 찾아오는 노숙자들을 위해 식탁을 준비해주는 성도들이, 세상의 노크에 응답하는 아름다운 모습인 것 같아 즐겁습니다. 그들이 혹시 민망해 할까 싶어 ‘테이크 아웃(take out)’할 수 있는 방법까지 찾아낸 그 사려 깊음이 감격입니다. 넓은 예배당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상처받고 방황하는 이들의 빈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 먼저 다가가 주고, 또 찾아와 노크하는 누구에게나 가슴을 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지금 노크 소리 들리지 않으세요?

<산정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