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홍은주] 재정위기가 파시즘 불렀다

입력 2012-10-23 18:35


국가의 재정파탄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혼란과 극단주의자들의 득세로 이어진다는 것이 역사에서 배우는 분명한 교훈이다. 경제는 평상시에는 정치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막상 위기상황이 되면 통제가 어려운 정치적 휘발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수습할 수 없는 경제위기는 무능한 정부, 무기력한 공권력, 격렬한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 틈을 노려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것이다. 차분한 이성의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이단 정도로 여겨지던 극단주의자들이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대중의 비이성적 감정과 분노를 자양분으로 하여 정치 전면에 등장하곤 한다.

1917년 제정러시아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그 후유증으로 국민경제가 파탄나면서 “빵과 우유를 달라”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소비에트혁명으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경제난을 겪은 독일 국민들에게 맹렬한 국수주의를 불붙여 나치정권을 출범시키는 한편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역시 이탈리아의 극심한 경제위기와 사회적 혼란의 과정에서 생겨난 정치적 결과물이었다.

역사교과서 속 흑백사진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치적 극단주의에 대한 우려가 최근 유럽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재정이 어려운 일부 국가에서 수습하기 어려운 정치적 혼란과 극단주의의 징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직전을 방불케 할 만큼 보수화되는 현상이나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에서 전쟁터나 다름없는 혼란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비슷한 현상으로 읽혀진다.

유럽연합(EU) 정상들이 역내 채무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브뤼셀에 모여 고민하고 있는 사이 재정위기의 진원지인 그리스에서는 노동자, 의사, 항공관제사, 변호사, 공무원까지 직종을 가리지 않고 파업에 나서는 혼란 상황이 나타났다. 대규모 파업시위로 버스, 철도의 운행이 중지됐고 관공서는 업무를 중단했으며 빵집을 비롯한 상점 대다수가 문을 닫았다.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무한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경제가 극도로 어려워지고 재정이 한계에 부딪혀 경제가 추락하는 이른바 재정절벽(fiscal cliff) 상황이 폭발한 것인데, 문제는 이 사태가 그리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슷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이른바 ‘PIIGS’(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들 역시 정치적 혼란 상황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고 사태가 장기화되면 유럽연합의 생산기지인 동유럽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이전 같으면 미국과 영국 등이 앞장서 사태해결을 시도했을 텐데 이들 역시 비슷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은 2011년 재정적자 규모가 16조200억 달러로 역대 최대 수준일 뿐 아니라 증가폭이 제2차 세계대전 상황으로 높아져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부양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재정지출을 최대한 늘렸기 때문이다. 내년 초 여야 간 별도 합의가 없는 한 각종 감세혜택이 종료되고 재정지출이 자동 삭감되면서 경기가 폭락하여 대공황 후반부에 나타났다는 더블딥(double dip)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글로벌 재정위기의 확산과 정치혼란, 극단주의의 발호가 남의 나라 일이기만 할까. 우리나라 역시 공기업 부채와 지자체 부채를 합쳤을 경우 재정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발생한 재정위기로 세계경제에 예기치 못한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닥칠 경우 우리 역시 무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정은 국가가 국민들에 대해 정치적 통제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경제부문 위기가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마지막 방화벽이다. 대선정국을 맞아 후보들이 온갖 경제공약을 쏟아내고 있지만 결국 정부에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다.

홍은주(한양사이버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