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들이 본 한국경제… “재벌 규제·복지 확대 위해 정부 역할 늘려라”

입력 2012-10-22 19:08


세계적인 경제 석학인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최근 한국을 다녀갔다. 이들은 각종 간담회와 강연, 포럼에서 한국의 경제민주화와 미래 정책방향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재벌을 규제해야 하며, 복지 확대를 위해 정부 역할을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 규제=경제민주화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재벌문제에 대한 입장은 ‘규제’가 대세였다. 삭스 교수는 지난 18일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이 주최한 간담회에서 “정부가 재벌을 규제하지 않으면 재벌이 정부를 인수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재벌의 입김이 정치권에까지 확산되면 부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정책적 수단마저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다.

그는 “돈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를 활용해 경제시스템을 바꿔 놨다”면서 “재벌이 돈과 힘을 가지고 정치를 장악하는 것은 시장을 장악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로 재벌의 선거자금 지원을 꼽았다.

하지만 재벌 해체와 같은 극단적 규제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대기업은 기술혁신과 세계화의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조직”이라며 “재벌이 무너지면 사회에도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이들을 국유화하는 것은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재벌 해체보다 재벌 규제와 개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루그먼 교수도 “시장의 힘이 아닌 정치 프로세스 때문에 소득 구조가 왜곡되고 있다”면서 “자유를 지키려면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듯이 경제민주화도 방어하지 않으면 잃고 만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0일 숭실대가 주최한 강연에 참석해 “재벌도 중산층의 소득원이기 때문에 기업의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면서 “재벌이 정치적 영향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행사할 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민주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투명하고 민주적인 정치 없이는 민주적인 시장도 없다는 것이다. 재벌의 시장 지배력과 불공정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국내 논의와 다소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경제민주화는 궁극적으로 정치 리더십의 혁신을 요구한다는 석학들의 통찰은 자연스럽게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소득 불평등 해결을 위해 ‘큰 정부’ 필요=사회 양극화를 해결하고 복지혜택을 늘리는 것은 올해를 관통하는 이슈다. 크루그먼 교수는 강연에서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중 바람직한 방향을 묻는 질문에 “지속가능한 복지를 위해서는 보편적 복지가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그는 “저소득층만을 위한 선별적 복지는 지출이 적지만 차상위계층(기초생활수급대상 바로 위의 계층)은 혜택을 받지 못해 경제활동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면서 “소득과 자산에 따른 선택적 복지가 아니라 소득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복지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빈부격차를 해결하는 것은 ‘큰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삭스 교수는 증세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간담회에서 “한국은 성숙경제에 돌입했고 빠른 속도로 노화되고 있다”면서 “고소득 국가들 가운데 미국보다 세금을 적게 내는 유일한 국가”라고 꼬집었다. 그는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수 비중은 23∼24%인데 비해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세율이 45∼50%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삭스 교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매우 큰 사회복지망을 갖고 많은 세금을 쏟아붓지만 고소득 생활을 한다”면서 “공정한 소득 분배를 해주면서도 비즈니스 인센티브를 꺾지 않는 재정정책 덕분”이라고 말했다.

◇한국, 적극적인 재정·통화정책으로 경기 부양해야=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수출과 내수, 투자가 모두 부진한 한국경제에는 어떤 해결책이 필요할까. 루비니 교수는 지난 11일 매일경제신문이 주관한 세계지식포럼에서 “글로벌 경기악화가 통제 불가능해 수출 지향적인 한국경제는 둔화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 뒤 “한국은 국가부채비율이 높지 않아 재정을 활용한 경기부양 여력이 있고 한국은행도 통화정책 수단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세계경제에 ‘퍼펙트 스톰’(동시다발적 악재가 한꺼번에 덮치는 것)이 몰아칠 것이라고 공언한 대표적인 비관론자다.

루비니 교수는 방한 전 인터뷰에서도 “한국의 GDP 성장률이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2%대에 그칠 것”이라며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통화정책으로 성장 위주 정책을 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평소 경기부양에 적극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크루그먼 교수 역시 “한국이 세계경제 사이클에 맞추기보다 거꾸로 세계경제가 나쁠 때 지출을 늘리는 역발상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