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공탁금-이제는 돌려 받아야 한다] 재벌·명문사학 가문, 전범·수탈기업 주식 집중매수
입력 2012-10-22 08:50
일본과의 과거사 현안에서 수조원에 이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미지급 임금 문제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일본에 면죄부를 줬고 일본 정부와 기업은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광복 후 67년이 흘렀다. 특히 국민일보 취재로 친일파를 비롯한 조선인들이 전범 기업의 주식을 대량 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일반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지난 5월 24일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일보는 새로 드러난 조선인들의 전범 기업 주식 보유 실태를 고발하고, 100만명이 넘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취지로 5회에 걸쳐 ‘목숨과 바꾼 일제 강제동원 공탁금, 이제는 돌려받아야 한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1회 : 또 다른 공탁금-민초들이 강제동원으로 신음할 때 그들은 주식을 샀다
‘떳떳하지 못한’ 공탁금 2471만엔(시가 5881억원)의 조선인 주주 명부가 최초로 공개되면서 일제 강점기 사회 지도층의 치부가 드러났다. 2010년 4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공한 ‘조선인 노무자 공탁 기록’은 전체 공탁금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어 향후 ‘전범 기업 주식 공탁금’은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재벌 및 사학 명문가=공탁 기록에 따르면 호남은행 창립자 현준호씨는 일본고주파중공업 주식 7550엔어치 등 모두 2만3425엔 상당의 일본 기업 주식을 매입했다. 일본고주파중공업은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8개 작업장을 운영하며 군수품을 생산한 대표적 ‘전범(戰犯) 기업’이다. 현재 6개 자회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두산그룹 창립자 박승직씨는 조선 토지 수탈을 위해 설립된 조선흥업사 주식을 포함해 4942엔 상당의 일본 기업 주식을 보유했다.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씨 가문도 공탁 기록에 등장한다. 김씨의 동생이자 삼양그룹 설립자인 김연수씨는 개인적으로 1만1192엔어치 일본 기업 주식을 사들인 데다 자신이 대표였던 삼양사 명의로 일제의 농촌 수탈 자금을 조달한 조선저축은행 주식 29만4000엔어치를 갖고 있었다.
식민지 수탈에 동조하며 친일파가 자본을 투입해 만든 조선생명보험 등의 기업도 전범 기업 주식을 집중 매입했다. 또 당시 산업자본 격이었던 상회들도 전범 기업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다. 강신(康信)상회, 개풍(開豊)상회, 대성(大星)상회는 미쓰이물산 주식을 적게는 440엔어치, 많게는 5218엔어치 매입했다. 미쓰이그룹은 현재 아사히맥주 등 45개 자회사를 거느린 일본의 대표적 재벌이다.
현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인 경성전기주식회사와 조선전기주식회사, 현 삼양홀딩스의 전신인 재단법인 양영회도 일본고주파중공업 등 전범 기업 주식을 매입했다. 재단법인 동덕여학원(현 동덕여학단), 보성전문학교(현 고려중앙학원),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 등 명문 사학 재단도 주주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이밖에도 윤보선 전 대통령의 당숙 윤치호씨, 1948년 주일대표부 대사를 지낸 신흥우씨도 거액의 자금을 투자해 주주 명부에 올랐다.
◇조선귀족회 등 친일파=1910년 강제합병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귀족 직위를 하사받은 이들의 모임인 조선귀족회는 7018엔 상당의 다이이치신탁은행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공탁 기록에 기재돼 있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가 주축이던 조선귀족회 회원들은 총독부를 통해 헐값 또는 무상으로 토지를 획득해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친일파들은 개인 명의로도 적극적으로 전범 기업 주식 매입에 앞장섰다. 이완용의 외조카이자 19년 창씨개명 허가 건의서를 냈던 한상룡은 천문학적인 투자를 했다. 그는 조선흥업사 주식 3만4800엔어치, 다이이치신탁은행 주식 2807엔어치 등 모두 3만9657엔 상당의 주식을 샀다. 한상룡을 포함해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에 등재된 친일파 51명도 조선인 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일본 기업, 조선인 주주 공탁금 찾아주기에만 열성=조선인 주주가 발견된 조선인 노무자 공탁 기록을 보면 일본 기업은 멀게는 42년부터 최근에는 94년까지 도쿄은행에 공탁금을 예치했다. 하지만 조선인 노무자 공탁금은 50년을 기점으로 거의 사라졌고 이후에는 조선인 주주에 대한 공탁금만 예치하고 있다. 일례로 미쓰이물산은 86년 조선인 주주 30명분 30만8353엔을 공탁했다. 황민호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는 “강제동원 노무자들의 공탁금은 숨기고 내놓지 않는 일본 기업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