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산을 찾는 뜻

입력 2012-10-22 18:40

看水看山, 看人看世.

물을 보고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

조식(曺植·1501∼1572) 유두류록(遊頭流錄) ‘남명집(南冥集)’


주말에 오래간만에 북한산에 올랐다. 중흥사지, 산영루를 지나 승가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단풍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울긋불긋한 원근의 산 능선에 눈이 훤해진다. 이용악 시인이 ‘전라도 가시내’에서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라고 노래한 시기가 바로 요즈음인가보다.

예전 분들도 산을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유람에만 그치지 않고 산수유기를 남기거나 그림으로 즐겨 묘사했다. 남북조 시대 종병(宗炳)은 산수 유람을 아주 좋아하였는데 늙어서 유람하지 못하게 되자 이전에 다닌 곳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와유(臥遊)를 즐겼다고 하지 않던가.

남명 조식은 여러 벗들과 1558년 58세의 나이로 지리산을 유람하고 상당히 긴 유기를 남겼다. 청학동에서는 마치 신선이 된 것 같다가도 다시 세상을 만나지 못해 뜻을 펴지 못한 군자들의 자취를 찾아보고는 상심해하기도 하였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내리며 ‘선을 따르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따르는 것은 산에서 무너지듯 내려오는 것과 같다(從善如登 從惡如崩)’는 중국 춘추시대 좌구명이 쓴 ‘국어(國語)’의 한 구절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옛분들의 산수유기를 읽어보면 산에서 책을 읽거나 악공을 시켜 피리 불게 하는 일이 빈번하게 나오는데, 상상 속으로나마 그들의 고상한 풍류에 동참해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즈음이 되면 평소 산에 가지 않는 분들도 가로수나 먼 산 빛을 보고 한번쯤 주체하기 어려운 흥이 일 듯도 하다. 맑은 공기를 쐬며 몸을 움직여 걷는 것 자체가 좋거니와 잠시 세사를 벗어나는 홀가분함은 또 어떤가. 조금 더 의미를 찾아본다면,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산에 대하여 옛분들이 남긴 유기(遊記) 작품이나 ‘택리지’ 등을 찾아보고 또 유적지에 들러 한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산수에 노닌다고 해서 보고 느끼는 것이 산수뿐이겠는가. 그곳에 남은 옛사람의 자취를 찾아보고 또 세상을 읽어본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