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강기훈씨 재심, 법원 명예 걸고 진실 찾아라
입력 2012-10-21 20:04
문제의 사건은 1991년 5월 8일에 발생했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국 부장 김기설씨가 서강대 건물 옥상에 유서를 남긴 채 분신자살한 것이다.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이후 대학생들의 항의분신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였다. 검찰은 김씨의 유서 대필자로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씨를 지목했다. 자살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이후 강씨는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받고 1994년 8월 17일 만기출소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형의 집행이 종료됐는데도 논란이 끊이질 않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군이 조작된 증거로 드레퓌스라는 유대인 대위를 파멸로 내몬 사건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에 와서 생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전면적인 재조사를 한 끝에 법원의 판단과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내자 강씨가 2009년 재심을 청구하게 됐고 19일 마침내 대법원의 결정이 내려졌다. 너무 오래 걸렸지만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라는 주문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쟁점은 단순하다. 당초 검찰이 두 사람의 글씨가 동일하다는 근거로 내세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검찰이 수사도중에 고문을 가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를 밝혀내면 된다. 그 사이에 국과수 소속 문서감정인들의 증언 가운데 일부가 허위라는 사실, ‘전대협 노트’ 등 김씨의 필치라고 주장하는 증거들이 새롭게 나왔기 때문이다.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사법부의 명예를 걸어야 한다. 대법원이 재심 결정에 3년이나 걸린 데 대해 법원 수뇌부의 예단을 읽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진실화해위의 결론에 물음표를 달면서도 심리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재심의 이유로 들었으므로 판결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법원은 보수와 진보가 충돌하는 시대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오로지 법과 양심으로 21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