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지킴이’ 윤장섭 이사장 “허허, 이런 좋은 ‘물건’ 앞에선 천금을 아끼지 말아야지…”

입력 2012-10-21 18:26


그가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는 건 뉴스였다. 그간 수많은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물관 관계자들은 “이런 일은 처음이며, 아마도 마지막일 것 같다”고 했다. 호림(湖林) 윤장섭(90·성보문화재단 이사장 겸 성보학원 이사장). 지난 17일 오후 그의 호를 딴 호림박물관(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열린 개관 30주년 특별전 ‘호림, 문화재의 숲을 거닐다’ 개막식에서였다. 그의 반평생 수집이야기를 담은 같은 제목의 책 출간기념회를 겸한 자리이기도 했다.

감개무량했던 것일까. 개막식 후 행사장을 찾은 기자들에게 간담회를 자청했다. 이날 정갈한 회색 양복에 화사한 주황색 넥타이를 매 ‘생애 최고의 날’의 기쁨을 표현했다. 꼿꼿하게 자리에 앉은 그는 구순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정했다. 다만 청력이 약한 탓에 며느리 오윤선 호림박물관장이 간간히 거들었다.

간송 전형필(1902∼1962)을 아는 사람이라면 호림 윤장섭을 알아야 한다. 간송이 일제시대 사재를 털어 문화재 유출을 막았다면, 호림은 광복 이후 그 바통을 이어받아 문화재 지킴이 노릇을 했다. 개성 출신 실업가 윤 이사장의 컬렉션은 도자기, 서화, 전적류 등 1만5000점에 달한다. 이 중 국보가 8건, 보물 46건이다. 가히 국보급 잔치다.

수집 인생은 1971년 상감청자 한 점을 구입한 게 계기가 됐다. 이후 수집 유물이 늘어나 82년 박물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후배 컬렉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싸게들 사려고 하니까 가짜가 들어오는 겁니다. 그럼 좋은 문화재를 만날 수 없어요.”

좋은 ‘물건’ 앞에선 천금을 아끼지 않았던 윤 이사장의 컬렉터 인생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윤 이사장은 소장자가 값을 부르면 절대 깎지 않는다. 중간상인과는 흥정을 하지만 지나치게 가격을 낮추려는 일은 범하지 않는다. 능력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물건은 깔끔하게 포기한다.

제일 비싸게 산 건 수집 초창기인 74년에 구입한 ‘청화백자매죽문호’(국보 222호)이다. 당시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에게 자문했다. 최 선생은 “이건 중국 것과 다르다. 조선의 맛이 있다. 꼭 사셔야 한다”고 했다. 중간상인이 분위기를 눈치 채고 4000만원을 불렀다. 종로 4∼5층 빌딩 한 채 값이었지만 두말 않고 값을 치렀다.

71년 일본에서 사온 7권짜리 ‘백지묵서묘법연화경’(국보 211호)은 재일교포 소장가가 “한국으로 돌려줘야 할 물건이니 황수영 선생(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정한 사람한테 팔라”고 유언했던 물건이다. 이렇듯 유출됐던 귀한 문화재들이 윤 이사장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온 예는 적지 않다.

컬렉션 인생에는 ‘개성 출신 3인방’ 선배들이 함께한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선생이 그들이다. 1922년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공립상업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상과를 졸업해 그는 미술에는 문외한이었다. 69년 그가 운영하던 서울 소공동의 무역회사 성보실업에 최순우 황수영 선생이 찾아왔다. 7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차례로 지냈던 두 사람은 월간 ‘고고미술’ 발간 비용 문제로 애를 먹자 돈 좀 번 고향 후배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 흔쾌히 잡지 후원을 맡은 게 고미술 수집 인연으로 연결됐다.

‘개성 출신 3인방’은 고미술품을 구입할 때 자문가 노릇을 했다. 특히 최 선생과는 70년대 초반 유물 구매 과정에서 주고받은 편지가 200통 가까이 된다.

“최 관장 귀하, 신년에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를 빌겠습니다. 몇 점 탁송하오니 품평 앙망하나이다. ①백자상감모란문병 200만원 호가 ②분청사기철화엽문병 250만원 ③청화백자인문편병 ④자라병. 고가를 호가하는데 진품인지 의심이 납니다(혹 모조품은 아닌지요).”

“②번, 이 물건은 사두십시오(후략).”

74년 붉은 편지지에 파란색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는 이번 전시회에 당시 산 유물과 함께 전시됐다. 간담회 후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일부러 이 유물 앞에 선 윤 이사장은 작고한 최 선생을 회고했다.

“고마움의 정표로 수집품 하나를 드린 적이 있는데, 글쎄 그걸 나중에 기증하면서 기증자로 선생이 아닌 제 이름으로 하신 거였어요. 그만큼 청백하신 분이셨어요.”

좋은 물건이면 값에 관계없이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니 지금도 중간상인들은 귀한 물건이 나오면 호림박물관을 찾는다. 이 때문에 도난물건이 호림박물관으로 흘러들어간다는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청자 한 점이 수십억원을 호가한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유물을 소장한 그의 삶은 어떨까. 의외로 소박하다 못해 자린고비로 비칠 정도다.

행사에서 축사를 한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세금청구서 등이 날아오면 알맹이는 버리고 봉투는 차곡차곡 모아서 거기에 손주들 세뱃돈 넣어 주시는 분”이라며 “그렇게 모은 돈을 문화와 교육 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했다”고 칭송했다. 윤 이사장은 성보실업과 함께 서울비료를 인수해 확장시킨 성보화학의 명예회장으로 있다. 또 79년 설립한 학교법인 성보학원(성보중·고등학교)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도 주중에는 소공동 성보실업 사무실로 출근한다. 박물관은 토요일 찾는다. 이때는 혜화동 자택에서 지하철을 이용한다. “운전기사도 주말엔 쉬어야지요.” 이런 배려에서 비롯된 걷기는 그의 건강비결이기도 하다. 걸어올 때는 가방이 무겁다면서 바퀴 달린 마트 쇼핑용 가방을 끌고 온다고 박물관 관계자는 귀띔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