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군대를 말한다] 敵보다 무서운 무기력 타성

입력 2012-10-19 19:07


지난 2일 발생한 동부전선 북한군 병사 ‘노크 귀순’ 사건은 우리 군의 기강 해이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대한민국 군대.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이곳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최전방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다는 한모(27)씨는 지난 15일 국민일보로 최전방 철책선 CCTV와 관련한 제보 이메일을 보냈다. “CCTV의 오작동이 너무 잦아 꺼놓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상 물체가 발견될 경우 경보가 울리도록 돼 있는데 나방만 날아다녀도 비상벨이 울려 하는 수 없이 ‘오프(OFF)’ 스위치를 누른다는 것이다. 강원도 최전방 초소에서 경계병으로 군복무한 뒤 최근 제대한 김모(25)씨는 “CCTV가 철책이나 담장 쪽이 아니라 장병 근무 지역을 향하도록 설치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선임병은 CCTV 사각지대에서 자고 후임병만 근무한다”고 덧붙였다.

최전방 지역에서는 “우리의 주적(主敵)은 북한군이 아니라 간부”라는 농담이 병사들 사이에서 오간 지 오래됐다.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이 북한군의 이상 동태를 지키는 게 아니라 근무 태도를 검열하는 장교의 움직임만 살핀다는 얘기다.

4년 전 비무장지대(DMZ)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한 북한군 장교 출신 이철호(32)씨. 며칠 전 한 TV에 나온 그는 “북한 특수부대가 남한군 복장으로 GP(최전방 경계소초)까지 침투해 훈련한다”고 증언했다. 북한 특수부대가 사흘 동안 교대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DMZ 내 우리 철책을 끊고 들어와 하룻밤씩 머물다 새벽 5시에 되돌아가는 훈련을 반복했다고 했다. 귀순 직후 여러 차례 이 같은 사실을 증언했지만 우리 군 조사 당국은 “그럴 리가 없다”며 윽박질렀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대학에서 컴퓨터프로그래밍을 전공하다 후방에서 컴퓨터 행정병으로 근무했다는 박모(31)씨는 “입대하자마자 사단 전산망 개선 아이디어를 냈더니 직속 상관이 ‘너 제대할 때까지만 그렇게 하면 되겠네’라는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고 군생활 경험을 털어놨다. 일반 회사라면 늦어도 한 달이면 되는 일을 군대에선 2년 동안 쉬엄쉬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박씨는 “그때 내가 군대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고 말했다.

‘노크 귀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무슨 일이 터져 군에서 초동보고가 올라오면 나는 무조건 안 믿는다”고 말했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90%”라는 이유도 덧붙였다. 이처럼 우리 군에는 최전선에서 후방, 말단 사병에서 군 수뇌부에 이르기까지 무사안일과 책임회피 풍조가 만연한 셈이다. 현재 복무 중이거나 제대한 장병 대다수는 이구동성으로 “나라 지키러 간 군대에서 배우는 게 비합리, 비생산적인 조직문화”라고 말한다.

한 예비역 장성은 19일 “장교 이상 직업군인들이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기보다는 현 상태 유지에만 급급하고 그러다 보니 합리적일 필요도, 적극적일 필요도 없다”면서 “군대 전체가 안이함에 물들었다”고 질타했다. 그는 “전투형 강군이 되려면 제일 먼저 이들의 ‘생업 근성’부터 없애야 한다”고 했다. 고위급 장교들이 군을 일반 직장으로 여기고 보신(保身)에만 연연하니 일반 병사들까지 물들어 버렸다는 진단이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