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깊고 깊은 내 죄의 뿌리
입력 2012-10-19 17:49
다윗이 고발하는 부류의 악인을 일생 만나지 않는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다윗이 상대해야 했던 악인은 “마음 깊은 곳에 죄의 속삭임만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시 36:1·표준새번역). 그런 자들의 입은 “저주와 기만과 폭언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혀 밑에는 욕설과 악담이 가득하다”(시 10:7).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 악으로 선을 갚고 다윗이 알지도 못하는 일을 캐묻는다(시 35:11). 친구들조차 다윗을 배반하고 악을 모의한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시 55:12∼13).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자 중에는 그가 신임하던 브루투스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번득이는 칼에 난자당하면서 남겼던 유명한 말, “브루투스 너까지도…”라는 구절이 다윗의 시편과 겹쳐진다.
거짓 증언과 기만과 욕설 정도라면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다. 죽음의 그림자는 여러 번이나 다윗의 턱밑까지 쫓아왔고 젊은 다윗은 삶의 희망을 포기할 지경이었다. “황소 떼가 나를 둘러쌌습니다…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나에게 달려듭니다. 나는 쏟아진 물처럼 퍼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시 22:12∼14) 다윗 앞에 놓여 있는 고통의 덫은 운명적이었던 것일까. 아들 압살롬까지도 군사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제거하려 했다니 기가 막힌 운명이다(시 3:7).
절체절명의 순간 다윗은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는 자신의 선한 양심을 주장한다(시 26:11). 그러나 아무리 깨끗하게 살려고 애써도 돌아보면 허물투성이인 것이 인간이 아닌가. 그러기에 알고 지은 죄뿐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는 죄까지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시 51:3, 9, 12). 아니, 죄의 뿌리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서는 더 깊은 곳,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 때부터 존재했다(시 51:5).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
죄의 고백으로도 고통과 고난은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분에 찬 기도가 나간다. 다윗은 자신을 살해하려고 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정의롭고 공정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악인을 멸하여 주시기를 간청한다(시 99:4, 9). “주님, 일어나십시오. 그들을 대적하시고, 굴복시키십시오.”(시 17:13) “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10:15) 이 정도의 탄원으로도 억눌린 분이 풀리지 않던 다윗은 아예 손수 칼을 들고 나아가 악한 자들을 진멸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편에서 승리를 선사한다. “나는 원수를 뒤쫓아 가서 다 죽였으며, 그들을 전멸시키기까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시 18:37∼39)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보면서 속이 후련하여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짝짝 보내게 된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다윗의 시편은 고난으로 시작했다가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의 복수로 끝나는 극적 반전의 해피엔딩이다. 거의 삼천년 전 씌어진 시가 이렇게 감동을 주다니 이만한 서사시가 없다. 하지만 속 시원한 해피엔딩도 잠깐일 뿐, 시편을 읽다가 복음서를 열어보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비판하지 말라(눅 6:37). 용서하라(마 6:14∼15).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 8:15)
망각과 미움, 무심과 증오의 경계
복수하는 다윗의 시편! 용서하시는 예수의 복음! 복수와 용서는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옛날 사막의 구도자들에게는 다윗의 복수와 예수의 용서가 서로 조화되었다. 무엇보다 사막의 구도자들은 예수의 복음을 근본으로 삼았다. 남을 판단하기보다(요 8:15) 자신 속에 있는 죄와 허물을 직시하기를 기꺼이 했다(요 8:7). 아울러 그들은 시편의 ‘악한 자’를 구체적 역사의 인물이 아니라 마귀로 해석했다. 용서를 방해하고 불화를 사주하는 마귀, 악한 생각을 불어넣는 마귀, 싸워 이겨야 할 마귀 말이다. 이렇게 용서의 복음을 붙들면서 마귀의 공격을 직시했기에 압바 베사리온과 같은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어떤 사제가 죄를 지은 형제를 교회에서 쫓아냈더니, 압바 베사리온이 일어나서 그와 함께 나가면서 말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압바 베사리온은 죄인으로 정죄 받은 형제를 오히려 받아들이고, 악한 마귀가 쏘는 비난의 불화살을 꺼버릴 수 있었다(엡 6:16). 한 교부는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비통하게 울면서 말했다. “그는 오늘 죄를 범했지만, 나는 내일 죄를 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비난의 화살을 거두고 자신을 돌아보았던 사막교부 같은 인간됨은 나에게는 아직 요원한 길이다. 마귀를 증오하고 마귀가 사주하는 죄를 증오하라는 걸 누군들 모르랴.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 그 누군들 모르랴. 그렇지만 용서와 사랑은커녕 망각과 무심조차 힘겨워하는 나로서는 애써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과 미움의 경계선을 왔다갔다 할 뿐, 사랑과 용서는 언저리라도 보이질 않으니…. 그런데 다윗에게 사랑하고 용서했어야지라고 쉽게 나무랄 수 없다면 다윗 발꿈치에도 못 미치는 나 같은 인물에게 무작정 돌을 던지지는 말아 달라.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망각과 미움, 무심과 증오의 경계선에서 우왕좌왕하는 내 꼴을 보아 하니, 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달라는 다윗의 히브리적 시편에서(시 10:15) 아직도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내 꼴을 보아하니, 내 죄의 뿌리처럼 깊고 또 깊은 것이 있을까.
<한영신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