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김순권] 옥수수 연구는 굶주린 자 먹이라는 하나님 심부름

입력 2012-10-19 20:11


올해도 노벨상 6개 부문 수상자 가운데 한국인은 없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음에도 정치적 고려가 많은 평화상 이외 일반 부문의 수상자 배출은 여전히 우리 민족의 간절한 바람이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려오는 매년 10월마다 국민들은 기대하고, 아쉬워한다. 특히 올해는 일본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안타까움은 더 커졌다. 일본에서 19명의 수상자를 낼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냐는 비탄과 함께.

각종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 인재들의 활약상은 눈에 띄게 많아졌지만 노벨상 수상은 아직 이른 걸까. 한때 국내 언론은 노벨상 수상이 유력한 한국인으로 ‘옥수수박사’ 김순권(67)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을 꼽았다. 초등학교 교과서도 ‘한국을 빛낸 사람들’이자 노벨상 도전자로 그를 기록한다. 1996년엔 그를 위한 노벨상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김 이사장은 농업 분야에서 굵직한 상을 여럿 받았다. 86년 벨기에 국왕으로부터 국제농업연구대상을, 같은 해 이탈리아에선 국제기술개발상을 수상했다. ‘악마의 풀’로 불리며 아프리카 옥수수 밭을 폐허로 만든 기생잡초 스트라이가와 공생하는 옥수수 품종을 세계 최초로 발견해 92년 나이지리아 명예 추장 칭호를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나이지리아 대통령 등의 추천으로 92∼93, 97년 노벨평화상, 95∼96년엔 노벨생리의학상 후보에 올라 기대를 모았으나 수상하진 못했다.

최근 서울 창전동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김 이사장은 경험을 바탕으로 노벨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기초과학연구 환경 조성도 중요하지만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 있는 세계 1인자, 인재 발굴부터 먼저 해야지요. 내가 보기에 노벨과학상은 특별히 받는 나라에서 계속 받거든. 우리도 한 사람 받으면 그게 계기가 될 수 있어요. 또 노벨과학상은 정해진 기간에 위원회에서 요구한 사람이 추천해야 서류심사가 들어가요. 나도 여러 번 카메룬 과학기술부장관이나 듀크 대학 총장 등이 과학상을 추천했다는데 정확하게 접수됐는지는 모르지. 극비니까(웃음).”

“내가 죽든지 이 일이 되든지…”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후 옥수수 육종으로 고려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하와이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하며 육종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쌓은 김 이사장의 진로는 ‘시험 낙방’이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1945년 울산에서 7남매의 막내이자 외동아들로 태어난 김 이사장은 부산상고에 지원했으나 낙방해 울산농고에 입학했다. 이후 어려웠던 집안형편으로 장학금을 보장한 경북대 농대에 진학했다. 농업경제학 교수가 되고 싶어 서울대 대학원에 지원하지만 지도교수로부터 ‘촌사람처럼 생겨 안 맞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떨어졌다. 농촌진흥청 통일벼 연구팀에 합류한 건 그에게 차선이었으나 그 당시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개인 의지보단 환경이 선택한 전공인 셈이다.

“나는 촌놈 중의 촌놈이고,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놈이요. 심지어 집안도 상놈 집안이야.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3번 떨어졌는데 그때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 건 신앙 때문이었죠. 고등학교 2학년 때 믿고 나서부터 바뀐 게 ‘긍정하는 삶의 태도’거든요. 이때 6·25 전쟁, 가난한 집안사정, 농업학교 진학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며 도전한 것도 이때부터고요.”

자신의 전공을 ‘굶주린 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선택된 사명’으로 생각을 바꾼 김 이사장은 모든 일에 목숨을 걸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모든 기도문 서두는 “내가 죽든지 이 일이 되든지…”가 됐다.

“예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잖아요. 성경에도 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울부짖을 때처럼 저도 그렇게 했죠. 미국 옥수수 밭에 펼쳐진 기술을 보고 우리도 이런 기술을 배워 잘 살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고, 아프리카와 북한에서도 죽이시든지 비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67일 가물던 땅에도 비가 와요. 죽이시진 않더라고요.”

공생

삶의 자세를 바꾼 뒤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는다. 김 이사장은 농촌진흥청에서 일하면서 고려대 석사 입학 시험과 미국 유학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했다. 72년 미국 하와이대학에 유학 가서도 3년 3개월 만에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졸업 이후 진로도 잘 풀렸다. 옥수수 육종학을 전공한 그에게 74년 미국 농산물종자회사들은 월급으로 3000달러를 제시했다. 당시 비슷한 나이 우리나라 공무원의 급여 50배 정도 수준이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있는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와 국내 대학에서도 함께 연구하자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알 굵은 옥수수를 보며 고국의 농촌이 떠올라 눈시울을 붉혔던 순간을 잊지 않았다. 제안을 뿌리치고 농촌진흥청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 쥐어진 월급은 당시 4만8000원. 한 가족이 생활하기 빠듯한 월급 때문에 그는 75년 ‘해방둥이 생활수기’에 응모해 받은 20만원을 생활비에 보태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 이사장은 연구에 박차를 가해 77년 알이 많이 열리는 한국형 하이브리드 옥수수를 개발했다. 전 세계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도전이었다. 강원도 옥수수의 소출이 배가됐고 농가 소득이 3배 이상 올랐다. 이 종자는 동남아권에서도 큰 호응을 얻어 국외로 김 이사장의 이름을 알리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79년 그는 돌연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떠나 17년간 옥수수 연구에 매진한다. 고국에서의 성공에 안주하기보다 더 배고픈 이들을 먹이는 게 그의 사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귀국 전 제의를 받았던 나이지리아의 IITA연구소에서 김 이사장은 서구 학자들이 ‘악마의 풀’이라 부르며 제거하지 못했던 기생잡초 스트라이가를 해결할 기상천외한 방안을 찾는다.

비결은 공생이었다. 기생잡초를 다 제거하지 않고 5%만 남겨 함께 살아가는 옥수수 종자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는 지난 30년간 서구 학자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안이었다.

“제 이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공생’입니다. 저는 이 이론이 하나님의 원리라고 생각해요. 해충도 쓸모가 있어 이 세상에 나온 것 아니겠어요. 억지로 죽이려고 하면 돌연변이가 나올 수밖에요. 세상도 마찬가집니다. 나쁘고 좀 부족한 사람도 같이 살아야지, 다 죽이려들면 더 나쁜 쪽으로 바뀔 수밖에요. 북한과의 관계도 공생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나쁘다고 도와주지 말자, 다 없어져야 한다는데 같이 살아야 우리가 더 강해질 수 있어요. 이게 공생을 통한 자연 진화의 힘입니다.”

북한과의 애증

김 이사장이 북한과 연을 맺은 것은 97년 초청장을 받고부터다. 초청장을 3번 받은 그는 아프리카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98년 북한을 방문한다. 당시 북한은 95년 대홍수로 인해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식량난이 심각했다. 식량 부족으로 어떤 농작물도 생산할 능력 없이 ‘죽기 전에 쌀밥을 먹고 싶다’며 자포자기한 북한 주민을 보며 그는 가슴을 쳤다.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북한 칠골교회에서도 울면서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하나님을 함께 믿자’고 했습니다. 참담한 현실을 접할 때마다 이 말을 하니까 북한 사람들이 ‘기도 열심히 해서 옥수수 좋은 거 만들어 주시오’라고 해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도 ‘나는 하나님 심부름을 하니까 내게 신앙의 자유를 줘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나에게 만큼은 신앙의 자유를 주더라고요,”

이후 현재까지 58번 방북하며 하이브리드 옥수수 종자와 비료, 각종 농기계를 지원한 그이지만 남북관계의 특수성으로 본의 아니게 비난도 많이 받았다.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지원했던 그가 2002년 대선에서 당시 이회창 대통령 후보 지지로 노선을 바꿨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2003년부터 3년간 북한에 입국하지 못하다 2006년 북한의 초청으로 다시 옥수수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 있을 때부터 북한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지만 김영삼 정부 말기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97년 대선이 가까워질 당시 국정원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기도만 하면 성령께서 그를 지지하라는 겁니다. 결국 선거 3일 전 당사에 가서 지지 선언을 했죠. 지역 감정을 없애는 일에도 한몫을 하고 싶었고요. 이후 북한에 지원한 3억여 원의 비료값을 갚아주겠다는 약속을 안 지켜 인간적인 마음으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기도한 뒤 한 지지 선언이라 후회는 없습니다.”

주님의 심부름꾼

김 이사장은 98년 3월에 ㈔국제옥수수재단을 설립해 북한 식량 위기와 30억 인구의 식량난 해결을 위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20개국에 적합한 새로운 옥수수 교배종을 만드는데 특히 북한과 몽골, 네팔, 캄보디아에서 만드는 종자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 종자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 공급되기 때문이다. 현재 남북 관계 경색으로 들어갈 수 없는 북한엔 기후나 토양이 비슷한 중국 단둥 등 접경지역에서 대신 연구를 진행한다.

이 외에도 그는 옥수수 대에서 에탄올을 추출할 수 있는 옥수수 육종을 개발 중이다. 옥수수 알맹이에서도 에탄올을 추출할 수 있지만 식량과 가축 사료가 줄어 식량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있어서다.

“옥수수 한 알을 심으면 중국에서는 1200개, 우리나라에서는 700∼800개의 알곡이 나옵니다. 저와 재단의 목표는 세계의 반인 30억 인구가 식량 고민 없이 잘 살게 하자는 것입니다. 또 옥수수로 친환경 에너지를 만들어 기후 문제도 극복하고요. 저는 이 옥수수에 세계 식량위기 해결과 기후변화를 차단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평생 육종가로서 옥수수 밭에서 일할 거라는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덕택에 팔자 고친 삶’이라고 표현했다.

“옥수수가 자라기 위해선 때에 따라 햇빛이 비치고 비가 와 줘야 합니다. 즉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좋은 옥수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죠. 제 삶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 원리를 기억해 옥수수로 하나님의 심부름을 땅 끝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키우십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