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한 야구선수의 인사

입력 2012-10-18 18:34


프로야구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는 포스트 시즌이 한창이다. 총 532시합, 장장 6개월간의 정규시즌을 끝낸 뒤 리그 챔피언 자리를 두고 펼치는 이 특별한 잔치는 선수뿐만 아니라 그들을 응원하는 팬들에게도 꿈의 무대이다. 그래서 그 무대에서 응원팀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의 희로애락을 공유하게 된 팬들은 누구보다 뜨겁고 역동적인 가을을 경험하게 되고, 그 특별한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그날의 감동을 되살려 준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2년 전 오늘 대구구장에서 한국시리즈 4차전이 열렸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4-0으로 앞선 8회말 1아웃, 우승까지 남은 아웃카운트 5개. 팀의 에이스가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섰다. 9회까지 2점을 내주고 9회말 2아웃, 1루에 동점 주자까지 나간 위기 상황에서 그는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우승의 순간 마운드에 서있었다. 그 에이스의 이름은 김광현, 그리고 홈에는 백전노장의 포수 박경완이 있었다.

내가 그해 가을을 좀 더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두 사람 때문이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난 뒤 대부분의 투수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환호하거나 다리가 풀려 마운드에 주저앉아 기쁨의 눈물을 흘리거나 한다. 그런데 그날 김광현은 좀 달랐다. 아니, 특별했다.

홈에서 마운드까지의 거리는 18.44m. 포수가 두 팔 벌려 뛰어오는 그 짧은 순간, 데뷔 4년차 투수 김광현은 자기 나이만큼 긴 시간을 그라운드에서 포수로 살아온 박경완에게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운드 위에서 힘찬 포옹으로 기쁨을 나눴다.

한 친구는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노트북 바탕화면에 담았다 했고 아는 교수님은 신문에 실린 사진을 스크랩해 두셨다고 했다. 그렇게 몇 초 안 되는 짧은 순간의 감동이 한 편의 영화보다 더 진한 여운으로 사람들 마음에 새겨졌다.

최고의 순간, 가장 빛나는 자리에서 자신을 이끌어준 선배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은 인지상정의 마음이건만 그것이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당연한 마음을 전하고 사는 것이 보기 드문 미담처럼 되어버렸다. 고마울 일이 없어 갈수록 세상살이가 팍팍하다 여겼는데 정작 팍팍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고맙습니다, 그 한마디가 듣기도 말하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그 희소성에 대한 반가움 때문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마음에 대한 회한 때문일까. 그날의 그 장면이 아직도 묵직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