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황태순] 안철수 바람

입력 2012-10-18 18:31


혁명이다. 시민혁명이다. 피를 흘리지 않는 명예혁명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혁명의 한가운데 있다. 지금까지 꾹꾹 참아왔던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그동안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니까 참았다. 북한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해서 또 견뎠다. 외환위기 때 사고는 자기들이 쳐놓고 피해는 고스란히 민초들의 몫이었다. 돌반지, 결혼패물까지 내다팔며 고통분담의 행렬에 동참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부익부 빈익빈’의 암담한 현실이다.

서울 강남 로데오거리나 홍대 앞 카페골목은 불야성이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청년들이 흥청망청 젊음을 만끽한다. 분명 같은 청춘인데 어떤 젊은이는 시급 5000원에 서빙하고 있다. 그 청춘은 동이 틀 무렵이 돼서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앉아 꾸벅거린다.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일까, 아니면 이 사회에 잘못 태어난 탓일까. 어디 청춘만 그러하랴. 중장년도 노년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그래도 굳건하게 버텨오던 우리나라가 날벼락을 맞은 것은 1997년 환란 때다. 그 이전에는 국가와 사회와 직장이 나를 보호하고 자식의 교육을 책임져주고 내 노후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최소한의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과 국가 간에 맺어진 불가침의 계약이고 무언(無言)의 약속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국가와의 계약은 깨진 지 오래다. 이젠 각자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각박하고 비정한 사회규범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미화된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며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딱 그렇다. 국민들은 정부와 정당 그리고 국가운영시스템이 더 이상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왜 여전히 군림은 하려고 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는 저항의식이 사회 곳곳에서 스멀거린다. 누가 불씨를 댕겨주기만을 학수고대하며 혁명을 꿈꾸고 극적인 변화를 기다린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듯이.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는 2010년 12월호에서 향후 30년 내에 사라질 것 중 첫 번째로 정당을 꼽았다. 2011년 발간된 ‘유엔미래보고서 2026’은 정보기술(IT)의 발달로 직업 정치인은 사라지고 똑똑한 대중 스마트 몹(smart mob)이 스스로 법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소수민주주의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도 이 지경인데 하물며 세계 최강의 IT강국인 우리나라에선 더 말해 무엇하랴.

대통령 선거를 정확하게 두 달 남겨놓았다. 대선주자들은 온갖 미사여구로 유혹하고 있지만 유권자들의 반응은 영 심드렁하다. 누가 돼도 마찬가지라는 냉소적인 심리가 팽배해 있다. 왜 그럴까.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그들만의 잔치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관료제를 중심으로 한 정부는 그렇다 쳐도, 내 손으로 뽑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마저 자기들끼리 뭉쳐서 기득권을 꽉 쥐고 놓지 않으려는 게 영 눈꼴사납다.

지난해 초 아프리카 튀니지에서부터 시작된 자스민혁명, 그리고 미국 월스트리트를 강타한 아큐파이(occupy-점령하라)의 에너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나라 유권자들은 기존의 국가운영시스템을 극단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 지난해 9월부터 불기 시작한 ‘안철수 바람’은 정치혐오와 정당불신을 심판하려는 시민정치혁명의 시발점이었다. 지금까지 1년 넘게 그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혁명은 진행 중이다.

물론 혁명의 결과가 다 해피엔딩은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변화를 기다리며 혁명을 꿈꾼다. 불확실한 미래가 불행한 오늘보다는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는 12월 19일 혁명의 불길이 어디까지 옮겨붙을지 정말 궁금하다.

황태순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