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 지뢰밭에 묻힌 ‘궁예의 꿈’… ‘사라진 도시’ 옛 철원 궁예도성
입력 2012-10-17 18:14
사라진 도시에도 가을은 온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낙곡으로 배를 불린 쇠기러기가 V자 편대로 민통선을 날아오르고 물오리 떼는 단풍으로 물든 한탄강에서 자맥질을 한다. 전투기처럼 토교저수지를 이륙한 재두루미 한 쌍이 우아한 날갯짓으로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넘더니 지뢰밭으로 변한 궁예도성 옛터에서 날개를 접는다.
전쟁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 정도로 파괴적이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강원도 옛 철원이 바로 그런 도시다. 1945년 광복 무렵 서울에 50만 명이 살 때 철원은 3만8000명이 거주할 정도로 번화했다. 일제의 계획도시였던 철원은 광복 전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기적을 울리던 교통의 요충지.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철원역은 서울역이나 대전역 못지않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쑥대밭으로 변한 철원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한가운데로 철조망이 지나가면서 버려진 땅으로 남았다. 제2금융조합, 얼음창고, 농산물검사소, 노동당사, 철원제일감리교회 등 포탄에 날아간 건물들이 뼈대만 혹은 터만 남아 그날의 아픔을 증거하고 있다. 현재의 철원은 전쟁 후 갈말읍 일대에 새롭게 조성된 신철원.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진 옛 철원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은 앙상한 뼈대만 남은 3층짜리 노동당사. 북한군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인 노동당사 계단은 미군의 탱크가 밀고 올라간 캐터필러 자국이 선명하고, 벽돌로 쌓은 벽에는 이곳에 갇혀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의 절규가 낙서처럼 적혀 있다.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철원은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태봉국의 도읍지였다. 후고구려를 건설한 궁예는 서기 905년 개성에서 철원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꿨다. 그리고 30만 년 전 북한의 평강고원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현무암지대에 궁예도성을 건설했다.
궁예도성의 흔적은 철원평화전망대 왼쪽 군사분계선 일대 지뢰밭의 방초에 묻혀 있다. 노란색 모노레일이 철원평화전망대를 향해 고도를 높이자 쇠기러기 수천 마리가 수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학저수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어 남방한계선 철책선 너머로 단풍이 든 잡목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잡목에 가려 군사분계선과 북방한계선은 보이지 않지만 멀리 김일성고지와 낙타고지 사이로 평강고원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올해 옥수수 수확이 좋았는지 망원경 속의 북녘은 옥수수 말리는 작업도 한창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지만 궁예도성은 외성 12.5㎞, 내성 7.7㎞, 왕궁성 1.8㎞로 이루어진 삼중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의 대동방국 건설 야망이 깃든 궁예도성은 918년 궁예가 몰락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폐허로 변한 궁예도성은 600여 년 후 강원도 관찰사 송강 정철의 방문을 받는다. 송강은 관동별곡에서 ‘궁왕(弓王) 대궐터에 오쟉(烏鵲)이 지지괴니 쳔고흥망(千古興亡)을 아는다 몰으는다’고 노래했다.
894년 10월에 강릉을 장악한 궁예는 군사 3500명을 이끌고 사라진다. 그리고 열 달 후인 이듬해 8월 느닷없이 철원에 나타났다. 역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궁예가 걸어갔던 길은 어느 코스일까. 평생을 비무장지대(DMZ) 연구에 몸 바친 함광복 한국DMZ연구소장은 삼국사기 찬술자들이 남긴 몇 개의 지명을 단서로 볼 때 궁예의 대장정 루트는 DMZ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삼국 통일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걸었던 ‘궁예의 길’이 1000년 후에는 ‘분단의 길’이 되고 말았다는 것. 아울러 그가 건설했던 궁예도성도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안쪽에 자리해 우연치고는 대단히 잘 짜여진 각본처럼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6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송강 정철이 ‘궁예의 길’을 정확하게 거꾸로 걸어갔고 그 길도 DMZ라는 사실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갈말읍의 군탄리는 백성들에게 배척당한 궁예가 군사들에게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넘자 군사들이 탄식하며 울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1000년 후에는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이 땅에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군탄리에서 전역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라진 도시 옛 철원에서도 계절의 변화는 순리적이다.
◇여행메모
한탄강 중류 고석정 관광지 내에 위치한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033-450-5588)는 옛 철원 관광의 거점으로 이곳에서 출입 신청을 해야 민통선을 관광할 수 있다. 제2땅굴과 철원평화전망대(모노레일 포함), 월정역사, 승리전망대를 둘러보는 입장료는 어른 4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2000원. 하루 4차례 본인의 승용차를 이용해 단체로 관광해야 한다. 매주 화요일은 휴관.
철원=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