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 17절
빌라도는 불명예스러운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늘 되풀이되는 빌라도는 원망의 대상이고, 탄식의 대상이며, 주님을 모함한 자로서 반면교사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적어도 주님을 살리려 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입은 적도 없었으나 예수님을 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모인 군중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그들은 오히려 강도를 살리겠다고 선택했습니다. 주님과 내 삶 가운데 이러한 갈등과 모순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봐야겠습니다.
‘예수는 국가보다 우선하는가?’ 이 질문은 많은 오해를 만듭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 국가를 위하는 일과 대립된다고 보는 섣부른 판단은 언제나 교회를 위축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에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세속 왕국에 자리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자리에 사랑과 인애, 자비와 용서가 충만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오히려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종교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그들의 자리를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예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종교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위해 예수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종교인이 정치적인 상황까지 고려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빌라도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죄인들을 만났습니다. 또 병자를 만났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는 많은 기적을 통해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선택은 바라바였습니다. 바라바는 강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정도의 강도라면 그는 살인자였을 것이고 다른 사람을 잔혹하게 대했을 것입니다. 민중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예수에게 지나치리만큼 적대감을 가졌습니다.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거절한 예수에게 그들은 잔인한 형벌을 외칩니다. 예수께서는 능력이 있고 많은 이들을 위한 희생도 분명 있었습니다. 커져가고 계속되는 민중의 요구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예수를 다수의 유대인들이 민중이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세속에 대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예수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들 역시 빌라도만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따를 수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를 따르는 것은 분명 무엇을 얻기 위한 단계로서의 여정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옭아맬 올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물욕과 정욕, 성공과 또 자신의 인생을 아름다운 장밋빛으로 물들이기를 원하였지만 주님은 물욕과 정욕, 명예욕과 권세욕을 이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광야에서 버리고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러 욕망들은 존재합니다.
어쩌면 오히려 물욕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따르고, 권세를 얻기 위해 예수를 따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주님과 동행해야 하며 따라야 합니다. 정치적인 고려도, 나의 욕구도 예수의 부르심 앞에 버리게 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자기 유익 없이도 얼마든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음을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바라바도 아니고 가이사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닌 오직 예수님을 위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울 동부순복음교회 서순열 목사
[오늘의 설교] 바라바인가, 예수님인가
입력 2012-10-16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