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광해, 광해군

입력 2012-10-15 22:19

1000만 관객 기록을 앞둔 ‘광해’의 흥행 비결은 무엇일까. 영화 한 편이 관객의 집중적인 사랑을 받을 때는 이유가 있다. 키워드는 영화의 제목이다. 제작사는 교과서 용어인 ‘광해군’으로 쓰지 않고 ‘광해-왕이 된 남자’로 표기했다. 광해군을 새롭게 조명해 조(祖) 또는 종(宗)의 반열에 올리려는 의도가 읽힌다. 연산군 혹은 연산을 다룬 영화 ‘왕의 남자’와 차별화를 시도한 부분이다.

실제로 광해군은 연산군과는 질이 다른 인물이다. 권력을 위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형 임해군을 죽인 데 이어 궁궐 건축에 집착해 나라 살림을 거덜낸 부분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연산군처럼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금(後金)과 싸우는 명나라에 파병하면서 ‘관형향배(觀形向背:형세에 따라 태도를 정함)’라는 외교훈령을 내리기도 했다.

광해군은 다만 서인과의 싸움에서 졌다. 광해군에 대한 이미지도 이런 패자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권력을 잡은 자는 지난 권력의 흔적을 지우게 마련이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세력은 쿠데타의 정통성을 위해 광해군을 인륜을 저버린 임금으로 매도했다. 춘향전에서 악행을 일삼은 변학도가 광해군의 화신으로 치부될 정도였다.

광해군은 졸지에 궁궐에서 강화도로 쫓겨났다. 강화도는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관리감독이 수월해 요인들의 유배지로 활용됐다. 이곳에서 아들과 며느리, 부인을 잃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가 친청(親淸)파 광해군과 더불어 무슨 작당을 할까 두려워 강화도 북쪽의 교동으로 옮겨져 10년을 살다가 불귀(不歸)의 땅 제주도에 버려졌다.

제주성 안에서 그가 맞은 형벌은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외부와의 격리를 위해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가 둘러쳐진 곳에서 4년을 살다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제주는 송시열 등 5명의 고명한 유배객을 오현(五賢)으로 받들지만 광해군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로 옮겨졌다.

영화는 더러 시대정신과 결부되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영화를 관람한 뒤 눈물을 훔쳐 화제가 됐다. 안철수 후보도 앞서 “지도자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는 멘트를 트위터에 올렸다. 박근혜 후보의 관람 소식은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행여 민심을 반영한다면 그 후광은 야권 후보를 비추고 있음이 분명하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