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우리시대의 무늬

입력 2012-10-15 19:20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이고, 산천과 초목은 땅의 무늬이고,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은 사람의 무늬이다.

日月星辰 天之文也 山川草木 地之文也 詩書禮樂 人之文也

정도전(?∼1398), 삼봉집 권3 ‘도은문집서(陶隱文集序)’


동양은 문(文)의 문명이다. 요임금의 덕은 ‘상서’ ‘요전(堯典)’의 첫 문장에 흠명문사(欽明文思)라는 네 글자로 표현되어 있다. 문은 경천위지(經天緯地), 하늘과 땅을 다스려 질서를 세운다는 의미다. 순임금의 덕은 준철문명(濬哲文明·슬기롭고 문명하다)이라 하였고, 우임금역시 문명의식을 그대로 이어 ‘천하 사방에 문명을 폈다(文明敷于四海)’고 하였다. 문의 문명과 의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문은 무늬이다. 혹자는 씨줄, 날줄이 교직된 천의 무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 올 한 올 실이 교차하면서 비단을 짜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한 올의 실로 있을 때와 실들이 짜여진 비단은 성질과 쓰임이 전혀 다르다. 양질전화(量質轉化)이다.

사물이나 생각의 무늬를 정형화하면 문자가 된다. 문자가 모여 문장을 이룬다. 문장을 가지고 성인은 하늘과 땅의 도(道)를 담았다. 이것이 경전이다. 이 경전에 제시된 매뉴얼을 재해석해 동양의 지식인들은 시대의 무늬를 빚었다. 곧 사람의 무늬, 동양의 인문(人文) 전통이다.

대한제국 시기 ‘개화’라는 말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화에는 야만사회를 문명세계로 교화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이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고 자란 나라를 야만으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도저한 문명의식을 지녔던 당시 지식인들의 자부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열고 이 강토 위에 새로운 문명을 열고자 했다. 그 희망과 의욕을 위의 문장에 담았다. 다음 세대의 신숙주가 ‘서울에 우리의 문명을 여노라(開我文明漢陽水)’라고 노래한 것도 꼭 같은 의식이다.

하늘이 가을 별들로 무늬를 짜는 계절,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가을이 다 가도록 땅은 찬란한 무늬를 수놓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무늬를 짜야 한다. 어떤 무늬일 것인가. 숙연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규필(성균관대 대동문화硏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