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통폐합 갈등의 현장-거창중 고제분교… 2013년 입학 예정 1명뿐 반발, 주민 설득도 난항
입력 2012-10-14 18:37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최모(56)씨는 “아들의 공부도 문제지만 사회성 결여가 더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최씨의 중1 아들이 다니는 거창중 고제분교 학생은 고작 29명. 1학년은 8명이다. 유치원 때부터 봐왔던 동네 친구 7∼8명이 교우관계의 전부다. 새 친구와 어울리는 방법을 체득할 시기를 놓칠까봐 노심초사하는 이유다. 그는 “큰 학교 아이들을 만나면 주눅부터 드는 아들의 모습이 안쓰럽다”면서 “개인의 능력보다 어울려 일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라던데 먹고사는데 급급해 아들에게 못할 짓하고 있다”며 한숨쉬었다.
◇작은 학교의 낭만은 초등학교까지=교사 1명당 학생 4∼5명에 불과한 학교.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밥도 먹고 공도 차는 낭만은 초등학교까지다. 교과별 전문교사가 있는 중학교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학생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학습 기회도 복지 혜택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 9일 찾아간 고제분교는 인근 초등학교에 학사 일정을 맞추고 있었다. 30명도 안되는 학생수로는 자체 급식이 불가능해 초등학교 급식 일부를 가져와 해결한다.
또 초등학교 통학버스를 얻어 타므로 초등학교가 쉬면 학부모들은 비상이 걸린다. 농촌 지역의 특성상 부부가 함께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고 오전부터 일터에 나가있다. 초등학교가 휴일이면 부부 가운데 한명은 일손을 놔야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30%에 달하는 다문화·결손·조손 가정 학생들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통학이 불가능한 처지다.
학습 환경도 열악하다. 이 학교 교사는 모두 8명. 국어·영어·수학 등 필수과목은 1명씩 교사가 배치됐지만 미술·음악 등은 타 학교와 교사를 공유한다. 주요과목도 1∼3학년을 교사 1인이 맡으므로 교사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된다. 만약 연수 등으로 결원이 생기면 임시교사로 대체되는데 수업의 질을 보장받기 어렵다. 또한 본교인 거창중만 해도 수준별 수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고제분교 학생들은 과목당 교사가 1명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1학년 8명만해도 학업 수준이 제각기 다르다. 중간 수준에 맞춰서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어 상위권 하위권 학생 모두 만족할 만한 수업이 이뤄지지 못한다. 체육 활동도 제한적이다. 축구 시합을 하더라도 전교생이 모여야 하는데 중1∼3학년까지 학사일정을 맞춰 모이는 것이 쉽지 않아 소규모 체육활동만 가능하다. 읍내에 있는 큰 학교나 도시의 학생들에게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 학부모는 “읍내 애들과 군 체육대회에서 축구 시합을 하면 0대 9로 지기 일쑤다. 상처받은 아이들을 보면 부모로서 할말이 없다”고 말했다.
◇학교 통폐합 논의에 지역사회 양분=경남교육청은 면 소재 마리중(28명), 웅양중(57명), 위천중(48명), 거창중 신원분교(18명)와 고제분교를 묶어 거점학교를 만든다는 계획을 내놨다. 기숙형 학교로 만들면 다문화·결손·조손 가정 학생들이 방치되는 문제도 해결되며 학습 환경도 개선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이 지역 일부 학교는 다문화·결손·조손 가정이 45% 이상이고 매년 비율이 상승하고 있어 추진이 불가피하고, 학생수 감소로 어차피 몇 년 안에 학교들이 문을 닫을 처지라며 지역사회를 설득 중이다. 고제분교의 경우 내년 입학 예정자는 단 1명이다.
그러나 반발이 거세다. 지역 농민·학부모·교육 단체는 ‘거창농촌 작은학교 살리기 운동본부’를 조직했다. 통폐합에 부정적인 동창회와 일부 주민도 가세했다.
이들은 사춘기 아이들을 가둬놓는 기숙형 학교가 옳은지 따져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학생을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시킬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이나 왕따 당하는 학생은 잠들기 직전까지 괴롭힘을 당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없어져 균형 발전에도 역행하므로 300억원에 달하는 통폐합 비용을 각 학교에 투입하면 충분히 학교들을 살릴 수 있다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학습권·학생복지는 허공에=지역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교육지원청은 설문조사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학부모 찬성 75% 이상이면 통폐합하겠다는 것인데 찬성측에서는 “지나친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고제분교의 설문 대상은 중1∼초4 학부모로 20명이다. 학부모 6명만 반대하면 나머지 14명의 뜻과 달리 무산된다.
교육청이 지난 11일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반대 측과 토론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설득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이미 반대로 돌아선 분은 설득이 어렵다”고 토로한다.
게다가 반대 측은 설문조사 방식도 문제 삼고 있다. 통폐합의 영향을 받는 초등학교 1학년까지 설문 대상을 확대해야 하고, 만약 설문에 응하지 않은 학부모는 ‘기권’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육청은 농번기이므로 학부모를 직접 찾아 의견을 들을 계획이지만, 반대 측은 “투표의 일종으로 민주주의 원칙상 당연히 기권”이라고 팽팽히 맞선다.
어른들의 끝없는 명분과 절차 논쟁에 정작 학생들의 권리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모습이다.
거창=글·사진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