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고독한 삶의 환희를 꿈꾸는가… 극사실주의 작가 지석철의 개인전 ‘不在’
입력 2012-10-14 17:45
다들 높고 좋은 의자를 차지하려고 난리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언젠가 내려가야 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극사실주의 작업을 해온 지석철(59·홍익대 회화과 교수) 작가는 30년째 빈 나무 의자를 그리고 있다. 누군가 앉으면 부러져버릴 것 같은 그의 의자들은 낡고 거대한 가죽 소파 위에 세워져 있기도 하고, 빈방 가운데 하얀 방석에 얹혀 있기도 하다.
25일까지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에는 다양한 공간에 의자가 놓여 있는 그림들이 걸렸다. 의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부재(不在·nonexistence)’ 시리즈 20여점을 선보인다. 13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의자의 의미에 대해 “현실 너머에 있는 희망을 갈구하고, 고독한 삶의 환희를 꿈꾸는 현대인들을 상징한다. 결국은 인간을 은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82년 프랑스 파리비엔날레에 한국 대표작가로 참여할 때 대나무 가지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만든 미니 의자를 출품한 이후 꾸준히 의자를 제작해왔다. 일상에서 스쳐 지나간 풍경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신선하게 느껴질 때 그 공간에 나무나 철로 만든 미니 의자를 배치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나서 그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사진보다 더 세밀한 작업이다 보니 오랫동안 붓질을 해야 한다. 100호짜리 그림 한 점을 완성하기까지 4개월가량 꼬박 작업에만 매달린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보다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연출자의 입장이 되는 것을 즐깁니다.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 버리는 대상들을 각색하고 연출하는 작업이 매력적이죠. 내 의자에도 계속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1970년대 서구미술의 영향(미니멀리즘)과 아카데믹한 교육을 통해 습득한 소묘력은 작가에게 ‘극사실주의 모노톤 회화’라는 스타일을 갖게 했다. 바다 너머에 놓여 있는 의자 그림은 그의 고향(경남 마산)에 대한 아스라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촛대, 커피 잔, 나무줄기 등과 어우러진 의자 작품은 고독과 상실 같은 심리적인 요소를 반영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인체해부 조각을 차용한 의자 그림 등 인간이 등장하는 신작 ‘부재의 사연’이 출품됐다. “2010년 모나코에 들렀다가 궁전 앞에 세워진 데미안 허스트의 대형 조각을 맞닥뜨렸어요. 임신한 여성의 인체를 세라믹으로 빚은 입체조각인데, 저기에 빈 의자를 대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지요.”
곧게 뻗은 나무 기둥 하단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고, 꼭대기엔 빈 의자가 거꾸로 얹혀져 있는 작품도 눈길을 끈다. 크고 작은 조약돌이 늘어선 백사장에도, 묵직한 앤틱 카메라 앞에도 손톱처럼 작은 의자가 나뒹굴고 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인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처음부터 의자의 주인은 없었던 것일까. 각자 앉아 있는 자리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02-732-3558).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