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0) 노리치의 줄리안

입력 2012-10-14 20:34


16가지 ‘사랑의 계시’ 받고 교회에 은둔 기도의 삶

지난 추석 연휴, 가까운 산에 올랐다. 골짜기를 타고 힘겹게 정상에 올라가니 청명한 가을 하늘이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역시 높은 산은 깊은 골짜기가 만든 것이었다. 영성의 산도 그러한가? 그렇다. 무대처럼 드러난 영광의 역사 배후에는 반드시 기도의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영국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헨리8세로 촉발된 교회 개혁이 오랜 고난과 핍박의 산고 끝에 청교도를 낳고 그 뿌리에서 미국이 태어났으며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 구세군, 스펄전, 웨일스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이 땅에 토마스와 존 로스의 선교의 발자취가 남겨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골짜기에서 말없이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 첫 번째가 노리치의 줄리안이다.

줄리안, 기도의 사람

줄리안은 1342년 12월, 영국 노리치 지방에서 태어났다. 노리치는 영국의 동부, 멀리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바라보는 항구도시다. 18세기 후반까지 영국 지방도시 중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30여개의 교회는 당시의 번영을 말해준다. 줄리안의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은둔하며 기도했던 교회가 줄리안교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줄리안이 평생 기도했던 줄리안교회는 지금 어디 있을까? 줄리안교회는 현재 성공회 수녀회에서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다. 1942년, 폭격으로 폐허가 된 교회를 성공회가 재건한 것이다. 낡은 교회의 담을 손으로 만졌다.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이 작은 교회에서 한 여성이 평생 기도하며 살았다니….

줄리안이 살았던 시대는 고통과 절망의 시대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민생이 파탄되고 흑사병으로 유럽인 3분의 1이 죽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1337∼1453), 농민혁명(1381) 등으로 유럽 전체가 혼란에 빠졌고 교황은 ‘아비뇽 유수’(1309∼1377)를 끝내고 막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치는가?(롬5:20)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이 일으킨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같은 시대 독일 라인강에서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러, 헨리 수소, 토마스 아 켐피스 등이 활동했던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똑같은 시대 영국에서도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그들이 리처드 롤, 윌터 힐톤, 무명의 ‘무지의 구름’ 작가, 그리고 줄리안이다.

주님은 나의 기쁨, 나의 만족

평범했던 중세의 여성 줄리안이 은혜의 사람이 된 것은 어느 날 임한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었다. 1373년 5월 13일, 서른한 살의 줄리안은 심하게 앓다가 하나님으로부터 16가지 계시를 받았다. 이것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 기록했다. 줄리안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었다. 그가 본 16가지 계시 중 10가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었고 나머지는 예수님의 말씀, 그 주변의 모습, 그리고 줄리안과의 대화였다. 우리도 어느 날 기도하다가 환상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감격을 느낄 것이다. 줄리안이 그랬다. 그는 놀라움과 감탄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앞에 눈물로 고백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해 고난을 당한 것에 만족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선하신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 너를 위해 고난을 당한 것은 나에게는 기쁨이며 무한한 즐거움이다. 만일 더 많은 고통을 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줄리안은 예수님이 고난은 그에게 즐거움이요 기쁨이요 무한한 행복이라고 한 말 속에서 세 가지 천국을 보았다. 천국은 ‘기쁨’ 곧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곳이요, ‘행복’ 곧 예수님이 영광 받는 곳이며, ‘무한한 즐거움’ 곧 성령님이 주시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곳이다.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이 즐거워하시는 곳. 그런데 그 천국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는 순간 이런 은혜가 임했다. “나는 당시 고통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고통 속에 계신 예수님을 나의 천국으로 선택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천국도 나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장차 내가 그곳에 있을 때에 예수님은 나의 기쁨이 되실 것입니다.”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십자가의 예수님은 줄리안에게 예수님을 유일한 기쁨이요 만족으로 여기게 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기쁨, 다른 만족은 없었다. 기쁨은 동시에 통회와 영혼의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세 가지 선물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깨닫는 것이요, 둘째는 서른 살에 육신의 병에 걸리게 해달라는 것이요, 셋째는 그가 세 가지 상처를 체험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레너드 스위트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반응할 뿐이다.’ 작은 사랑은 갚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큰 사랑은 갚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너무 커서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볼 뿐이다.

줄리안도 십자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상처를 달라고 기도한다. “주여, 나에게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나의 죄를 회개하는 통회의 상처를 주옵소서. 주님의 긍휼을 깨닫는 깨달음의 상처를 주옵소서.”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것을 ‘상처’라고 불렀을까? 십자가에서 입은 예수님의 상처의 작은 부분이라도 그는 자기 몸에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이 모든 기도를 생전에 응답받았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줄리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에게 죄는 치명적인 것이다. 죄가 있어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만일 죄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깨끗했을 것이며, 우리를 처음 지으셨을 때의 하나님 모습을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한 역설적인 은혜를 베푸신다. 즉 “죄는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일들이 잘될 것이다.” 죄는 분명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은 죄가 인간에게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다. “선하신 주님은 내가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질문과 의심에 대답하시면서, ‘나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으며,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 것이다. 너는 친히 모든 종류의 것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볼 것이다’는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 고난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보좌에 앉으신(계4:2), 일찍이 죽임 당한 그리스도를(계5:6) 바라보아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들어야 하는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일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