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석삼조’ 주중 결혼식] 개성&여유… 하객엔 주말 보장
입력 2012-10-12 18:09
박길상(61) 노동부 전 차관은 올해 초 딸 결혼식을 가까운 친척들에게만 알리고 간소하게 치렀다. 나중에 자녀 결혼 소식을 접한 직장동료, 후배, 유관 기관, 친한 학자들로부터 ‘섭섭하다’고 한소리 들었다. 박 전 차관은 지난 6월에는 아들 결혼식을 치렀다. 이번에는 지인들의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 가족과 친척 외에도 하객들을 몇 명 초대하기로 했다. 간소하게 치르되 예식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고 고심하다 평일 퇴근시간 이후에 예식을 하기로 했다. 결과는 대호평이었다. 지난 6월15일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 웨딩홀에서 열린 다른 결혼식은 없었다. 혼잡한 예식장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혼주에게 눈도장을 찍고는 돌아서기 바쁜 주말 결혼식장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었다. 이날 하객 1인당 식사비용은 술값을 포함해 3만원이 채 안 들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
300여명의 하객들은 오후 7시부터 2시간30분 동안 진행되는 결혼식을 느긋하게 지켜보며 축하를 나누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대부분 서로 아는 얼굴들이어서 오랜만에 회포를 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박 전 차관이 오랜 세월 공직에 몸담고 있다 보니 학자들이나 기자들도 많이 찾아 왔다. 한 하객이 말했다. “박 차관 덕분에 모두 모였네.” 이들은 한동안 못 보다가 박 전 차관 결혼식 덕분에 오랜만에 많이 모인 것이다. 6시30분쯤부터 차츰 모이기 시작한 하객들은 식이 끝나자 차례차례 2층의 식당으로 올라갔다. 하객 김영수(54)씨는 “여느 토요일 예식장 같았으면 붐비는 1시간짜리 지정 식당을 피해 그냥 귀가하거나 다른 식당으로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부 김소원씨는 “양가 어른들이 모두 하객들의 주말을 지켜주자는 데 합의했다”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처음에는 예식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참석률이 높았고 다들 만족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무엇보다 “오랫동안 얘기하고 즐길 수 있어서 정말 잔칫집 같은 분위기였다”면서 “다른 친구들에게도 주중 결혼식을 권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기자도 참석한 이날 결혼식은 신혼부부와 부모의 친구나 직장동료 및 거래처 사람들까지 모두 결혼식을 계기로 한바탕 친교의 장을 이뤘다. 반나절이나 하루, 이틀에 걸친 피로연과 함께 마을 축제로 치러지는 영화 속 외국의 결혼식 장면을 연상시켰다. 맘마미아, 나의 그리스식 웨딩, 대부1, 디어헌터 등….
할인된 가격에 서비스도 좋아
주말 민폐뿐만 아니라 허례허식을 막는 대안으로 ‘주중결혼식’이 뜨고 있다. 먼저 주5일 근무제 정착에 따라 토·일요일 결혼식은 하객들에게 ‘휴일 하루를 망친다’는 부담을 주는 게 사실이다. 주말 결혼식은 교통체증을 낳고, 짧은 예식시간 때문에 불가피한 천편일률적인 진행으로 결혼식 본래의 뜻과 개성을 잃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식이 허례허식과 ‘눈도장 찍기’ 등 사회적 신분과 부의 과시의 수단이 되는 데 일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중결혼식은 무엇보다도 축제로서의 결혼식, 가족과 지인들의 축복 속에 치르는 결혼식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의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중결혼식이 신혼부부에게 가장 좋은 점은 그들만의 개성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지난 2월 16일 목요일에 한 호텔 예식장에서 결혼한 신영후(31·여)씨는 “내 결혼식 하나밖에 없으니까 식장 분위기며 꽃장식, 테이블 장식까지 온전히 나에게 맞춰주고 신경써주더라”고 말했다. 신씨는 “드레스숍, 메이크업숍 등도 예약이 밀리지 않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던 점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지난 6월 8일 금요일에 결혼한 유명 대기업 홍보실 직원인 강성구(가명·33)씨는 “결혼식 자체도 비용 대비 만족도가 높을 뿐더러 예복을 빌릴 때에도 가장 예쁜 것을 고를 수 있고 미용실에서도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예식장 대부분은 주중 결혼식에 대해 식비와 예식장 임대료를 10∼15%가량 할인해 주는 게 일반적이다. 금요일에 결혼한 강성구씨는 “논현동의 P예식장을 이용했는데 음식값을 23% 할인받았다”면서 “여러 가지 비용에 대해 공식적인 주중할인율 외에도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객들 호응, 칼퇴근은 덤
금요일이나 주중 저녁에 결혼식을 치른 이들이 전하는 하객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처음에는 “불편하지 않을까 반신반의했으나 차분하고 조용해서 좋았다”는 것이다. 신씨는 “하객들의 반응이 ‘여유롭게 잘 치렀다’ ‘너무 좋았다’는 등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종업원 200여명 규모의 서비스업체 근로자 김영식(가명·36)씨는 지난 2008년 10월 31일 서울 세종로에서의 결혼을 금요일에 치른 덕분에 “흥행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토요일 결혼식의 경우 직장동료들이 많아야 10여명 참석할 뿐인 반면 자신의 결혼식에는 대거 40여명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하객이 많이 안 올 것 같다는 걱정과 달리 600여명이 몰려오는 바람에 예약한 450석이 모자라서 급히 예식장 옆의 식당 하나를 더 잡아야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직장동료와 거래처 사람들이 내 결혼식을 핑계로 칼퇴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집안어른 참석위해 주말 고집
양가 사돈이나 집안 어른들의 거주지가 다를 경우 대개 집안 어른들의 참석편의를 위해 토요일이나 일요일 결혼식을 포기할 수 없다. 김씨는 “부모님은 서울에 살지만 시골에 계신 친척분들을 위해 따로 차를 대절해서 모셔왔다”고 말했다. 서울 양재동 엘타워 웨딩예약부 관계자는 “최근 성수기에는 금요일에도 세 개의 홀이 다 차는 날이 있고 월∼목요일에도 한 달에 두세 건 정도는 치러질 정도로 주중 결혼이 늘었다”고 말했다. 생활개혁실천협의회 신상철 사무총장은 “가장 가까운 소수의 하객만 초청하다 보면 다같이 축하하고 함께 식사하는 본연의 결혼식이 된다”면서 “1인 가구 등 가구원 수가 줄어들면 저절로 개선되는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항 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