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노트-백소영] 가장 큰 마음, 애민(愛民)

입력 2012-10-12 18:11

계획 없이 어느 날 불쑥, 참 오랜만에 영화를 봤습니다. 광해가 정말 둘이었는지, 인조반정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지, 역사의 ‘만약’은 제게 그리 중요치 않았습니다. 고증의 부분은 역사가에게 남겨놓을 몫이겠지요. 다만 극장을 나오면서 제 마음이 흐뭇했던 것은 영화 안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큰 힘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높은 자리, 강력한 권력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전쟁터 같은 궁에서, 모두가 저 살 궁리만 하는 그 공간에서 왕의 명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왕을 지키고 싶어서 스스로 ‘대신해서’ 죽어간 두 민초의 모습이 오래토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천민인 하선이 가진 진정한 애민(愛民)의 마음이 결국은 그를 진정한 왕으로 만들더군요. ‘가짜’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를 위해 죽으려는 ‘그의 백성’이 생기더군요. 신분제의 선입견에 똘똘 뭉쳐있던 도승지도 결국엔 진심으로 그에게 머리 숙여 왕에 대한 예우를 하며 배웅했습니다.

대의명분, 국력신장, 국제경쟁력. 그런 큰 이야기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많은 백성이 다치고 상처입고 아파한 결과 얻는 것이라면요. 하선의 진정 어린 애민의 마음을 읽고 도승지는 신경증적인 의심으로 삐뚤어진 광해 대신 그를 진짜 왕으로 만들 생각마저 품더군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도승지는 공리주의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선은 더 큰 원칙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 어느 생명도 다른 생명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려 왕이 되고 싶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죽이고’ 얻게 되는 자리라면 싫다 했지요.

2000년 전 왕이 될 만한 카리스마와 애민의 마음을 가지고도 십자가로 향했던 한 분이 언뜻 떠올라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나를 헤치려는 그자까지 사람으로 사랑하는 마음, 생명으로 지키려는 마음, 그 불가사의한 마음이 가장 큰 마음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일 겁니다.

백소영<이화여대 인문과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