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전통시대도 노인의 황금기는 아니었다… ‘노년의 역사’
입력 2012-10-11 18:11
노년의 역사/팻 테인 외/글항아리
“노인도 정말 인간인가? (중략) 노년은 부끄러운 비밀, 금기시된 주제이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페미니스트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저서 ‘노년’(1970)에서 이런 지독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근대화 이전의 전통시대는 ‘노인의 황금기’였을까. 노년학의 근대화론에선 노인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하락하고 삶의 질이 악화된 건 근대 산업화 때부터라고 주장한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이 책은 그러나 전통사회의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노인상은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과거, 노인들이 손자 세대까지 아우르는 확대 가족의 정점에서 존경과 배려를 받으며 행복한 만년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조차 핵가족이 가족 제도의 중심이었다. 유럽의 절대왕정 시기,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리어왕’은 노후에 자식에게 재산을 넘긴 후 자녀에게 얹혀살았을 때 겪는 굴욕과 냉대라는 당시 사회상을 모티프로 했다.
연륜과 경험을 전수하며 국사에 적극 관여했을 것이라는 전통적 노인상도 소수의 탁월한 노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에도 이른바 노인정치라고 할 만큼 노인 집단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을 중심으로 한 노년의 사회사와 문화사를 씨줄과 날줄로 해서 짜낸 이 책은 이렇듯 우리가 노년의 역사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과 오해의 먼지를 툴툴 털어낸다. 그들이 그려낸 노년의 초상화는 생경스럽게 비치기까지 한다.
전통사회에서조차 노년을 지배한 키워드는 ‘주변화’였다. 17세기 이탈리아 희극에 등장하는 ‘판탈롱(통이 좁은 바지인데, 이탈리아 희극에서는 말라깽이 노인)’이라는 정형화된 인물은 당시 유럽인이 노년에 대해 갖는 조롱과 경멸의 표상이었다.
노년에 긍정성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적 정치문화가 출현한 18세기 프랑스에서부터였다. 과학과 의학이 노화 과정을 탈신비화한 게 기폭제가 됐다. 회화에선 저승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이승에서의 현실을 숙고하는 노인의 모습이 다뤄졌고, 문학에선 노년의 자의식이 소재가 됐다. 늙는다는 것은 20세기에 와서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적으로 됐다. 20세기에 들어서 대다수 사람이 노년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노년의 삶은 젊어졌다. 20세기 말 75세인 사람은 20세기 초 60세 혹은 65세인 사람들과 생리학적으로 비슷했다.
책은 이처럼 시대를 관통하며 당시 사람들이 늙음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노년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라는 일관된 질문에 답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어떨까. 책의 말미에 할애한 노인들 인터뷰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노년의 삶은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늙는 것에 악담을 퍼부은 ‘노년’이라는 책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노년기에 쓴 것이다. 원하는 걸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에서야 비로소 ‘늙은 것’이라는 말은 그래서 울림이 있다. 안병직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