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초록의 처방전

입력 2012-10-11 18:23


색채심리학에서 초록은 회복과 소생, 진정을 상징한다. 또 신경과 근육을 이완시켜주며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신경이 날카롭거나 흥분 상태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여 논리적이고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하니 오늘 나에게 딱 맞는 처방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부터 무리한 부탁을 받고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럴 때는 보통 당근을 한쪽 들고 토끼집에 놀러가서 똑똑 잘라먹는 귀여운 입을 보고 있거나 고양이를 끌어안고 뒹굴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오늘은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책을 들고 있어도 글자 한 자 눈에 들어오지 않아 몸을 비틀고 앉았는데 때마침 언니가 산책을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달콤하고 시원한 나무 냄새에 자연스레 깊은숨을 쉬게 된다.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고 머리가 맑아진다. 경쾌한 새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이다 보니 부글부글하던 속까지 더불어 잠잠해진다. 빌딩 숲에 조각난 하늘 대신 탁 트인 잔디밭 위로 온전히 펼쳐진 파란 하늘을 보니 꽁하니 뭉쳐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진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살면서 집 근처에 숲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특히나 오늘 같이 속이 불편한 날이면 그 고마움이 더해진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빠랑 공놀이 하는 사내아이, 잔디밭에 누워 음악을 듣는 여학생, 나무 그늘 따라 나란히 걷는 노부부. 숲에서는 누구 하나 찡그린 사람이 없고 모두가 부족함 없이 즐겁고 평안해 보인다.

이곳은 원래 경마장과 골프장이 있던 곳이다. 황사 같은 흙먼지와 버려진 마권, 취객들의 술 냄새와 골프장 제초제 냄새로 외면 받던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오랜 시간, 많은 예산과 정성을 들여 사람을 웃게 만드는 건강하고 행복한 공간이 되었다.

런던 27㎡, 뉴욕 23㎡, 파리 13㎡. 도시별 1인당 숲의 면적이다. 서울은 3.05㎡로 국제보건기구(WHO) 권고기준 9㎡에 훨씬 못 미친다. 그런데도 도시숲 지원 예산은 감소 추세라고 한다.

숲이 없다고 불행하진 않지만 숲이 있으면 좀 더 행복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숲은 빡빡한 우리 삶에 한 숨 쉬어갈 수 있는 여유와 싱싱한 생기를 더해준다. 도시숲은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주는 치유의 선물이다. 지금 우리에겐 더 많은 숲이 필요하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