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재난의 파수꾼이 되자
입력 2012-10-11 18:23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인재(人災)’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대형 사고와 함께 찾아오는 재난의 상당수가 하늘의 불가항력적인 조화와 상관없이 인간의 잘못에 기인함을 이르는 말이다. 최근 경북 구미에서 발생한 불산가스 누출사고도 인재일 뿐 아니라 관련 당국의 미숙한 대응으로 인해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불산의 특성상 물을 뿌리면 사태가 악화되는 데도 무지하게 물을 뿌렸다. 사고 직후 ‘방제약품으로 소석회를 뿌리고 내화학 보호 장구를 착용하라’는 환경과학원의 경고를 시당국과 소방당국이 묵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태가 심각하게 번지면서 피해의 확산을 막을 기회가 일곱 차례나 있었는데 모두 놓쳐버렸다. 이렇게 늑장을 부리는 동안 주민 수천 명이 병원을 찾을 정도로 피해는 커졌다. 농작물이 고사하고 가축들이 이상 증상을 보이는 등 그야말로 대형 재난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대형 사고에 둔감한 사람들
이런 종류의 재난을 한두 번 당해본 것도 아닌데 매번 타이밍을 놓치는 늑장 대응이 반복된다. 일차적인 사고 당사자가 보이는 무감각도 문제지만 공공 재난에 즉각 대처해야 할 관련기관의 주무부서가 드러내는 무책임의 극치는 여전히 부끄러운 현실이다. 즉각적인 현장 보도와 함께 경각심을 일깨워야 할 언론조차 권력의 눈치를 보는지 태만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번 구미사건만 해도 방송3사가 ‘침묵’하다가 이 지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자 사고 후 열흘이 지나서야 뒷북을 치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국내 기업의 산업재해로 하루 평균 240명이 다치고 6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만 해도 지난 6월까지 산업재해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1069명이나 된다. 그런데도 실형을 받아 응분의 대가를 치른 경우는 2.7%에 불과하다니 죽고 다친 약자들만 억울한 세상이다. 재난의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지 못하는 정부가 무슨 소용이며, 관할지역의 공공 재난에 무감각하고 무책임한 공무원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성서에도 재난의 현장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출애굽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렸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대형 재난의 탈출구를 마련했다. 또 하나님이 그 백성의 패역함에 진노해 멸절시키고자 할 때에도 모세는 그들의 지도자로서 제 목숨을 걸고 대형 재난의 상황을 막아냈다. 선지자 엘리사는 한 성읍의 악화된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수원지의 현장을 찾아가서 순발력 있게 대처했다. 공동체의 위기에 민첩하게 개입해 적시에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온 몸으로 공적인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재난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것은 종말론적 삶의 자세와 창의적인 긴장의식을 일깨우는 교훈이었다. 오늘날 그 교훈이 적용돼야 할 삶의 현장은 실로 다양하다. 특히 재난이 끊이지 않는 도심의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사람에 의해 촉발되는 재난의 가능성에 대비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늘 깨어 있는 책임감 필요
인간이 워낙 어설프고 연약한 탓에 모든 실수를 방지하고 모든 재난을 사전에 차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신만 차리면 깨어 있을 수는 있다. 날마다 제 삶의 공적인 이유만 뚜렷하게 직시한다면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파수꾼이 될 수 있다. 그 기본에 미달할 때 우리 사회는 더욱 위험한 재난사회로 급속도로 추락할 것이다.
재난을 대비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실종된 공동체는 서로 간의 신뢰와 존중이 불가능하다. 그런 지독한 불신의 세상에서 하나님인들 제대로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재난의 파수꾼이 되자.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