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풍경-백석의 만주 유랑과 해방정국] 우리말 소설처럼 되살려낸 ‘고요한 돈’
입력 2012-10-11 17:45
번역문학 위상 끌어올린 백석의 역작
백석은 1946년부터 10년 동안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한다. 1947년 시모노프의 ‘낮과 밤’과 숄로호프의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1948년 파데예프의 ‘청년 근위대’, 1949년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1’, 1950년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2’, 1954년 ‘체호프 선집1’ 등을 비롯해 10여 권의 러시아 시선집 번역이 그 결과물이다.
이 가운데서도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은 번역문학의 위상을 한 차원 끌어올린 백석의 역작으로 평가된다. 백석은 모두 8부로 구성된 ‘고요한 돈’ 가운데 5부까지를 1, 2권으로 나눠 번역 출간한다. 3권은 한국전쟁 이후 변문식이 번역한 것으로 확인되지만 전쟁으로 인해 완역의 기회를 잃었을 뿐, 백석은 2년 만에 200자 원고지 기준 4618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우리 토속어와 특유의 조어 등을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원작의 풍미를 한껏 살려내고 있다.
최근 입수된 ‘고요한 돈’ 번역본을 면밀히 살핀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는 “그리고리는 츄카린스키 부락에서 온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불기우릿한 청년과 함께 옷을 벗었다”라든지 “희퍼리스레한 하늘을 해가 헤엄쳐 가고” 또는 “파라스름하면서 노란 빛깔의 올찬, 알지 못할 열매가 잎사귀 줄기에 달려 있는 것같이 뵈었다” 등의 문장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했다. “‘불기우릿한’ ‘희퍼리스레한’ ‘파라스름한’ 등은 백석 시의 원천인 토착적인 삶과 그에 뿌리 내린 말에 맞닿아 있을 뿐더러 이국적 배경의 소설을 마치 처음부터 우리 말 소설이었던 것처럼 감각적인 생동감을 자아낸다.”(‘서정시학’ 2012년 가을호)
백석이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번역에 열정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만주체험과 북방의식에 기인한다. ‘고요한 돈’에 흐르는 숄로호프의 카자크주의적 어조, 이념의 무위성에 대한 믿음, 자연과 사랑의 가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백석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남한에서 ‘고요한 돈’이 번역된 건 이보다 30여년이 늦은 1985년이다. 일월서각에서 나온 총 7권짜리 번역본은 그나마 일본어판을 저본으로 여러 번역가가 참여한 이중번역이다. 동서문화사, 청목사 등에서도 번역본이 출간됐지만 부분 삭제로 인해 원작 훼손이 심하다.
“아낙네의 늦사랑은 벌판의 빠알간 츄럼프가 아니라 길가의 도꼬마리꽃처럼 꽃핀다.”(백석본)
“나이가 든 사람은 붉은 튜울립꽃이 아니라 개아욱꽃, 그 끈덕진 냄새를 풍기는 길가 들풀의 꽃으로서 꽃핀다.”(일월서각본)
두 판본을 대조한 연세대 최유찬 교수는 “백석은 번역에서 압축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표현이 시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백석의 번역 작업은 우리말의 가치와 가능성을 최대한 실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을 뿐더러 우리 출판계의 무문별한 번역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