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宮’ 권력의 욕망·가족 일상이 혼재된 그곳

입력 2012-10-11 18:20


궁궐, 조선을 말하다/조재모/아트북스

조선시대 한양엔 궁궐이 적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 덕수궁이 지어졌다. 이런 궁궐을 경비하는 상시 수비 병력도 2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궁궐에서 주인으로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남자는 딱 두 사람이었다. 바로 현재의 최고 권력인 왕과 차기 대권을 지명 받은 왕세자뿐이었다. 공주와 옹주는 민간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었고, 대군과 군들 역시 궐 밖에서 살아야 했다.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구현된 공적 공간인 궁궐은 이렇듯 위용과 권위를 자랑하는 건축물로서 권력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임금이 그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개인적 공간이기도 하다. 결혼과 장례 등 각종 의례가 치러지고, 궁중 여인들의 산책이 이뤄지고, 겨울철 몸을 녹이기 위해 온돌이 필요했던 곳이었다.

공간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 천착해 온 경북대 건축학과 조재모 교수가 쓴 이 책은 이처럼 공·사적 영역을 넘나들며 자못 흥미롭게 궁궐의 세계로 안내한다. 우선 저자는 ‘궁궐, 그 복잡한 얼개’ ‘조선 궁궐 배치의 특징’ 등을 명료하게 설명해준다.

“궁궐 안 수백 가지 건물 중 단연 중요한 것은 정전, 편전, 침전의 세 유형이다. 정전은 대규모 조회를 위한 가장 장엄한 장소이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으나 이곳에서 하는 조회나 외교적 의례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의식이다. 편전은 임금이 일상적으로 집무하는 건물로 그의 사무실이라고 할만하다. 사극에 나오는 어전 회의는 바로 편전에서 하는 대표적인 의식이다. 침전은 임금의 처소이다.”

정통 궁궐을 뜻하는 법궁으로서의 경복궁은 창덕궁 경희궁 등 다른 이궁들과 궁궐 배치에서 차이가 난다. 중국 자금성에서 보는 것처럼 축선을 따라 겹겹의 문과 거대한 마당과 우뚝 솟은 전각이 이어지면서 권위를 과시한다. 경복궁은 남북으로 긴 대지에 광화문, 홍례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아미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창덕궁 등 이궁은 상대적으로 배치가 조촐하다.

경복궁의 위용이 완성된 것은 세종대왕 때다. 궁궐 건축은 갖추어졌지만 그 공간을 사용할 명확한 체계는 없었는데 세종이 책봉과 혼례, 사신 영접, 국상 절차, 평소의 조회 등 필요한 의례 절차를 정해갔고, 의례에 맞게 건축물을 짓기도 했다. 선대 임금의 제사를 지내는 궁궐 내 시설인 문소전이 지어진 게 그 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이처럼 궁궐 건축을 통해 죽은 자에 헌사를 바쳤다.

궁궐은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난방이다. 임금의 공간 가운데 온돌을 사용한 곳은 침전뿐이었다. 정전이나 편전에는 따로 온돌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겨울철의 상참(매일 아침 이뤄지는 상견례)을 꺼리는 왕도 있었다. 창덕궁의 희정당 같은 전각은 특별히 침전이 아닌데도 온돌을 설치한 경우인데, 이 전각에서 여러 임금들은 신하들과 더불어 이야기 나누기를 즐겼다.

임금과 왕세자, 중전과 대비 등 왕실 사람들의 인적 구성원에 따른 공간도 자세히 분석한다. 관심을 끄는 건 내밀한 궁중 여인들의 공간이다. 임금과 왕세자의 공간에 비하면 규모는 작을지라도 궐내 여성들의 공간, 특히 대비전은 그 수가 많기도 했고, 시대에 따라 이들을 위한 별도의 건축 공사가 이뤄져 궁궐 배치를 바꿔야 했다.

궁궐 이야기는 3부 권력을 뒤흔든 욕망에서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연산군 광해군 흥선대원군 시절의 궁궐 건축을 통해 거기 숨겨진 권력자의 야망을 보여준다. 연산군은 성균관 근처와 창덕궁 금호문 담장 밑, 경복궁 주변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담장을 높이 쌓았다. 덕분에 도시 정비의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비원으로 불리는 창덕궁 후원은 왕실 가족의 소소한 일상사와 유희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근대 이행기, 궁궐에 들어선 유럽풍 의자를 통해선 외세의 욕망에 의해 훼손된 조선 왕실의 자존심이 읽혀진다.

궁궐은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공간이자, 당대 건축 기술과 운영 이념이 집약된 매력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소멸된 건축 형식이기에 지금 세대로서는 어쩔 수 없이 궁궐 건축에 느끼는 거리감이 있다. 이 책은 그 박제된 공간에 온기를 불어 넣어줄 ‘궁궐에 관한 모든 것’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