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룡 목사의 기독교, 안티에 답한다] ‘예수는 없다’에 대해

입력 2012-10-11 17:44


오강남 교수의 도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한 인간이다.” “예수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닮음의 대상이다.”

“오늘날 부패한 한국 기독교가 살기 위해서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말고 예수를 따르십시오. 교리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닮아가야 하는 대상입니다.” 위의 주장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일부분 옳은 것이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 가치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물질적 탐욕과 성취를 추구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한국교회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온당하다.

예수는 경배 대상 아닌 닮음의 대상이라고? 기독 신앙 핵심 빠뜨린 사이비 기독인 주장

그러나 위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제거한 채 겉포장만 그럴싸하게 꾸민 사이비(似而非) 기독교의 주장임을 직시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지성인 사이비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예수를 한낱 도덕선생으로만 보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닮음의 대상이므로 예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이비 기독교인의 주장은 한국교회가 도덕적 위기에 직면한 이 시기에 시의적절한 해법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속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이비 기독교를 부채질하는 책 중의 하나가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이다. 오강남씨는 예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일 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닮음의 대상이라 말한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기적 행함,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 그리고 예수의 재림과 심판 등을 부정한다.

게다가 그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즉 역사적 예수는 순수한 인간 예수를 말하고, 신앙의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가 신적 존재로 만들어진 교리적 예수라고 구분한다. 그렇다면 과연 실제 역사 속에서 사셨던 예수와 오늘날 교회가 믿고 있는 예수가 다른 예수란 말인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동일하다. 간략히 두 가지 이유만 살펴본다.

첫째, 오강남씨는 예수의 신성이 마치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치적으로 확정된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에서도 볼 수 있고, 니케아 회의 훨씬 이전에 그분은 이미 하나님으로 경배되었다. 그 증거는 사도 바울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서 나타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8)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5∼17)

이 말씀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고백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불과 2년에서 7년 안에 만들어져 초기 교회에서 찬양시 형태로 예배 중에 널리 불렸다고 한다.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신학자들 모두 이 시가 바울의 창작물이 아니라 바울 이전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임을 인정한다. 바울은 회심한 후 이 찬양시를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배웠으며, 그것을 자신의 편지에 그대로 인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니케아 종교회의보다 약 290년 이전에 고백된 내용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은 아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믿음이다.

둘째, 오강남씨는 예수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니, 너희는 나를 그렇게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계셨고 그렇게 선포하셨다. 예컨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는 말씀들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내는 말씀이다.

또한 마가복음 14장에서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했다(막 14:62).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자신이 ‘인자’로서 심판주로 올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자’란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세상 종말에 인류를 심판하고 영원히 다스릴 신적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사복음서에서 인자라는 말이 나올 때는 언제든지 예수의 신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강남씨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예수를 만났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배했으며, 예수께서도 자신의 신성을 분명하게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강남씨의 주장처럼 만일 예수가 인간일 뿐이라면 굳이 예수를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세상의 성인들은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 유교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이 중요하고, 불교도 부처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자체가 제일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누구로 고백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한 교리 암송에 있지 않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한다.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 속에 들어간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삶 자체가 영생인 것이다. 이러한 구원을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경험할 수 있기에 예수님이 소중하고 그분을 따르는 삶이 중요한 것이다.

(서울 큰나무교회· 기독교 변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