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34) 비성년의 거울에 비친 자화상… 시인 유형진
입력 2012-10-11 14:02
소녀에서… 시인에서… 엄마로 성장하며 스스로 소외를 선택한 ‘자발적 열외자’
유형진(38)의 고향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이다. 일산에 붙박여 유년시절을 보내고 학교를 다니고 결혼까지 했으니 두 달 전, 파주시 운정지구로 이사를 갔음에도 그는 여전히 일산 댁이다.
지금이야 불야성이 따로 없는 급성장 도시가 일산이지만 1970∼80년대만 해도 일산은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다. 드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마을 어귀엔 구판장이 있었다. 사람을 맞는 장소라는 의미의 ‘마즘재’ ‘노루목’ 등 정겨운 지명들도 그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다. 유년의 장소인 시골집 풍경 가운데는 ‘빨간 밭’도 있다. 흙에 철분 성분이 많아 황토보다 더 빨갛던 밭은 양계장 너머에 있었다.
“수백 마리의 닭 떼들이 꼬꼬 거리던 저녁이었는데. 늦은 저녁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는 아무도 없는 집을 나서는데. 엄마와 아빠가 나가 계실 구판장 아래 빨간 밭으로 가는데. 빨간 밭엔 알타리가 심겨져 있는데. 밭으로 가는 길은 양계장이 있는 밤나무 숲을 지나가야 하는데. 아이는 맨발인데. 이슬내린 흙을 밟으며 밤나무 숲의 양계장을 지나가는데. 꼬, 꼬, 꼬, 꼭. 닭들이 슬프게 우는데.”(‘빨간 밭’ 부분)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에서 안현미 최치언 신혜정 이근일 시인 등과 더불어 수학한 그는 대학을 졸업한 2001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듬해 결혼해 육아에 전념하던 시기인 2005년 첫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과 2011년 두 번째 시집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을 펴낸다. 말하자면 아들 안우용(9)군이 무럭무럭 성장할 때 엄마 유형진의 시 세계도 나이를 먹어간 셈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비성년(非成年) 상태의 자아가 남아있는 것이다. 이때 비성년이라 함은 보통사람이 사는 방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소외를 선택한 ‘자발적 열외자’이다. 예컨대 미성년은 성장 대기 중이고 비성년은 성장의 열외에 있다.
일산 빨간 밭의 소녀는 시인과 엄마라는 서로 상충된 개체로 세포 분열해 오늘에 이르렀으니 ‘소녀에서 시인되기’ ‘시인에서 엄마 되기’라는 성장사 속에 유형진의 비성년(非成年)과 성년은 혼재돼 있다. 그가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연작을 쓰게 된 계기도 아들과의 사소한 대화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우연히 아들과 말을 하다가 “넌 참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구나”라고 내뱉었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살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시 제목부터 정한 뒤 연작시를 쓰게 됐던 것이다.
“아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제는 아들이라기보다 친구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 고민도 다 털어놓는데 그럴 때마다 나름 조리 있게 조언도 해주지요. 아이가 크면서 나도 크는 것 같아요. 우리 나이로 열 살인데 나름의 세계관도 있고 제법 논리가 있다는 말을 주변에서 듣지요.” 우용이가 등장하는 시도 있다.
“짖는다, 짖다/ 말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잉글랜드, 잉글랜드.// 접은 우산대로 두 번./ 배전함을 친다./ 짖다 말고 올라가는.// 101호의 개는 떤다./ 떨다말고 소리.// 소리 속에 소리 속에 소리./ 멀리서 잉글랜드 정원 속에 엘리베이터./ 올라간다. 올라간다.// 누군들 어딘들, 놀랍고도 친근한,/ ‘우리’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배전함 안과 밖.// ‘우용’은 여섯 살, 개의 나이는 모른다./ 101호에 사는 것 밖에는/ 그리고 짖는.”(‘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우용과 101호의 개’ 전문)
유형진의 비성년적 세계는 단순히 현실 도피 수단이 아닌, 또 다른 모험을 독려하는 하나의 심리적 기제이기도 하다. 도심개발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그를 둘러싼 외부 변화는 너무 빨리 다가왔고 인지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옛 기호들은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좀 무뎌지고 싶은 마음이랄까, 좀 천천히 변화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심리가 그의 비성년을 구축하고 있다. 세상의 신비에 전율하던 아이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