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 “영화·드라마는 빵에 버터 발라먹는 느낌, 연극은 묵은 김치 맛이죠”

입력 2012-10-10 18:11


지난 7월 10일 방영된 MBC 월화극 ‘골든타임’(2회)의 한 장면. 인턴 면접을 보러온 이민우에게 외상외과 의사 최인혁 교수가 묻는다. “이민우씨, 의사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 당황해하는 이민우. 그에게 최인혁이 내놓는 답은 “(의사가) 예상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극중 최인혁을 연기한 베테랑 배우 이성민(44)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일까. 최근 서울 통의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성민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봤다.

“배우는 무엇이 가장 두려운가요?”

“흠…. 이 장면을 어떻게 연기해야 될지 모를 때가 가장 무섭죠. 고민을 해도 답이 안 나올 때가 있어요. ‘가짜’를 연기할 수는 없잖아요. 연기를 하려면 (각 장면마다) 저를 납득시켜줄 근거가 필요한데, 그 근거를 찾지 못하면 난감하죠.”

그는 이어 ‘골든타임’에서 보여준 자신의 ‘연기점수’는 60점밖에 안 된다고 자평했다. “수술하는 장면만 좀 잘 찍은 거 같아요. 수술 장면이 15번 이상 됐는데 나중엔 드라마 자문해주는 의사 선생님들도 (잘한다고) 인정해주셨어요. 개복에서 봉합까지 수술과정을 제가 다 알고 있으니까.”

# “나는 운이 좋은 배우”

이성민은 자신을 깎아내렸지만 ‘골든타임’ 시청자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가 근래 안방극장에서 보기 드문 ‘명품 연기’를 선보였다는 것을.

지난달 25일 종영한 ‘골든타임’은 이성민을 위한 작품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자밖에 모르는 뚝심의 의사, 현실에서도 꼭 한 번 만나고픈 열혈 의사 최인혁은 이성민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 쑥스러워했다.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라는 말만 반복했다.

“제가 아니어도 최인혁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골든타임’ 연출자인) 권석장 PD가 도박에 가까운 선택을 한 거죠. PD나 저를 제작진에 추천해준 (이민우 역을 연기한) 이선균씨한테도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이성민은 작품을 시작하기 전 이 정도 반응은 예상 못 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최인혁은 멋있어야 하는데 어떤 모습이 멋있는 걸까’…. 이런 고민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첫 방송 이전부터 제작진과 출연진은 ‘최인혁 신드롬’을 예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일례로 지난 7월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권석장 PD는 “이성민은 가진 능력에 비해 보여준 게 너무 적은 배우”라며 ‘이성민 열풍’을 예고했다.

이성민은 물밀 듯 들어오는 언론의 인터뷰 제의에 얼떨떨해하는 모습이었다. 이날도 그는 10여개 매체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실 어제 잠을 거의 못 잤어요. ‘(수많은 언론 인터뷰가 예정된) 이 상황이 뭐지?’ 싶더라고요. 그냥 저는 운이 좋았을 뿐인데.”

# 20년 연기인생 끝에 ‘골든타임’을 맞다

경북 봉화가 고향인 그는 20년 넘게 연기자의 길을 걸어왔다. 봉화 인근에 있는 소도시 영주에 위치한 극단 ‘소백무대’가 처음 배우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서울엔 2002년 올라왔다. 극단 ‘차이무’에 입단, 연극 40여 편에 출연하며 연극계에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가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한 건 2007년 드라마 ‘대왕세종’(KBS2)에서 선비 최만리를 연기하면서부터다. 이후 이성민은 ‘파스타’(MBC) ‘브레인’(KBS2) 등에서 개성 넘치는 감초 연기로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굴곡 많은 배우의 삶을 살아오며 그가 겪은 슬럼프 중 한 번은 지난해 찾아왔다고 한다. 영화 ‘하울링’과 ‘브레인’을 촬영하며 동료 배우 송강호(45) 신하균(38) 등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것이다.

“저처럼 나이가 들면 연기를 잘 못해도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송강호라는 엄청난 배우를 보면서, 신하균을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 거죠. ‘아, 내가 테크니컬한(기술적인) 연기만 하고 있구나. 중요한 걸 놓치고 있구나’…. 정말 땅을 치면서 한탄하게 되더라고요.”

이성민은 ‘골든타임’을 통해 전성기를 맞았지만, 차기작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연극이다. 그는 현재 상연 중인 극단 차이무의 ‘거기’에 21일부터 합류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찍으면 밥이 아닌 빵이나 버터를 먹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연극은 김치 같죠. 소화가 잘 돼요(웃음).”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