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뤼순의 가을

입력 2012-10-10 18:35


안중근(1879∼1910) 의사의 교수형이 집행된 중국 뤼순(旅順)감옥을 찾은 건 공교롭게도 만주사변 81주년인 지난달 18일이었다. 중국인들은 이날을 국치일로 기억한다. 그런 만큼 뤼순으로의 여행은 녹록지 않았다. 다롄(大連)버스터미널에서 표를 끊을 때 매표원은 물었다. “혹시 일본인 아니냐.”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피부로 느끼며 버스를 기다릴 때 추모 사이렌이 울렸다. 정확히 오전 9시18분부터 9시33분까지 15분 동안. 동시에 거의 모든 차량들도 일제히 경적을 눌러댔다. 귓전을 때리는 중국 민족주의의 분노한 음향을 뒤로 하고 당도한 뤼순감옥에도 묘한 긴장감이 번지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뤼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뤼순감옥의 유적 등급은 중국 정부가 매긴 최고 등급인 ‘AAAA’급. 이번에도 매표원이 힐끔거리더니 몇 마디 보탰다. “한국인이라면 문제없지만 오늘은 일본인에게 표를 팔지 않습니다. 안전상의 이유입니다.”

감옥 입구에 다가서자 다롄에서 왔다는 초등학교 1학년생 100여명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인솔 교사들을 따라 감옥 안으로 들어가자 표정은 굳어졌다. 검신실(檢身室)을 시작으로 8인 감옥, 6인 감옥, 의무실, 간수실, 복도 감시대를 거쳐 교형장(絞刑場)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교형장에 놓여 있는 통관(桶棺) 속 유해는 인솔 교사의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렬하게 민족주의를 주입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국적의식이 그리 진하지 않은 아이들은 달랐다. 감옥 묘지를 재현한 전시관에서 실제 해골과 앙상한 뼈가 담긴 20여개의 통관과 맞닥뜨리자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은 나머지 인솔 교사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귀신 나온다”라고 소리치며 가을 햇살이 양양하게 비쳐드는 출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 그 발소리, 그 공기의 진동이라니….

문득 이 아이들은 국적이 어디건, 누구의 자식이건을 따질 필요도 없이 죽음의 바닥에서 스스로 솟아오른 생명의 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전시관에 놓인 국화 화분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함보다 퇴색해 보였다. 유해가 담긴 통관들은 1971년 뤼순감옥과 인접한 원보산 공동묘지에서 전시를 위해 발굴된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의 교수형은 여느 죄수와는 달리 본관 내부에 설치한 특별 교형대에서 집행됐으며 통관이 아니라 소나무 침관(寢棺)에 담긴 채 마차에 실려 감옥 묘지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 의사의 유해 매장지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구전된 증언에 따라 2006년 6월, 남북공동조사단이 유력한 장소 4군데를 중국 측 협조 하에 현장 조사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2008년 3월, 한국 정부는 북한 측 동의를 얻어 북측을 제외한 한·중 발굴단을 구성하고 발굴조사를 했으나 역시 성과는 없었다. 뤼순감옥을 나서며 바라본 원보산 일대는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가장 유력한 장소였던 원보산마저 훼손되었으니 유해를 찾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미스터리이다. 2010년 사학자 최서면씨 등 전문가들이 일본 외무성사료관에서 뤼순감옥을 관할하던 일제의 관동도독부의 ‘정황보고 및 잡보’와 사형집행 명령기록 원본 등을 발굴했음에 비추어 일본이 안 의사 사형 집행 후 시신 매장지와 매장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들 자료는 당시 일본이 안 의사를 국사범과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실증해주고 있다.

그렇기에 언젠가 불쑥 유해 매장장소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102년 전 미스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중·일 3국은 안중근이라는 이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말로만 무성한 ‘역사의 종언’을 뚫고 아이들이 가을 햇살 속으로 내달리고 있지 않은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