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패를 바꾼 한마디… 역사를 바꾼 한순간
입력 2012-10-09 22:02
대통령 후보 TV토론… 美언론이 뽑은 결정적 장면
‘사각의 링에서 단둘이 맞붙는 복싱게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하이라이트 ‘대선후보 TV 토론(Presidential Debate)’을 일컫는 말이다. 대선후보들은 심한 압박감을 토로한다. 90분간 고독한 결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 차례 열리는 TV 토론은 유권자들에겐 후보 면면과 정책을 가장 가까이, 또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자리다. 이 때문에 선거 캠프는 준비에 심혈을 기울인다. 특히 판세가 오차범위 내 팽팽한 접전이라면 TV 토론은 ‘죽기 아니면 살기(Do or Die)’ 수준의 문제가 된다. 그런 만큼 사소한 판단 미스도 전체 판세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CNN방송과 워싱턴포스트, 폴리티코 등 미 언론들은 대선 판도에 분수령이 된 TV 토론의 결정적 순간들을 최근 꼽았다.
극단적인 이미지 정치
사상 첫 TV 토론은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이 CBS 방송국에서 맞붙은 1960년 9월 26일 열렸다. 두 정치인의 운명은 이미지에서 갈렸다. 구릿빛 피부에 자신감 찬 모습의 케네디는 준비된 대통령처럼 보였다. 반면 닉슨은 병원에서 갓 퇴원한 듯 창백한 모습으로 비쳤다. 대선 승자는 케네디였다. 닉슨은 충격이 컸던 듯 대권에 다시 도전했던 1968년과 1972년에는 TV 토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실제 토론 내용은 어땠을까. 폴리티코는 내용 자체에선 닉슨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전했다. 라디오 청취자들은 닉슨이 토론의 승자라고 생각했다.
TV 토론은 영웅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1992년 무소속 돌풍을 일으킨 로스 페로는 러닝메이트로 해군제독 출신 제임스 스톡데일을 지명했다. 스톡데일은 베트남전에서 8년간 전쟁포로로 잡혀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다른 포로들에겐 희망을 불어넣어줬던 전쟁영웅이었다. 그런 그에게 노회한 정치인들과의 대결은 무척 생소했을 것이다.
TV 토론에서 스톡데일의 첫 마디는 시청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나는 누군가. 난 왜 여기 있나?(Who am I? Why am I here?)” 이 발언은 그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한 페로의 자질과 신뢰도에도 치명타를 안겼다.
클로징 멘트의 위력
TV 토론에선 맺음말인 클로징 멘트가 중요하다. 1980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Are you better off now than you were four years ago?)”라는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대선후보의 발언은 미 언론들에 의해 역사상 가장 멋진 TV 토론 클로징 멘트로 평가받는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4년 전보다 나아졌다면 카터를 찍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선택을 하세요. 제게 말입니다.” 대선 승리는 레이건의 몫이었다. 레이건은 TV 토론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해 카터 대통령은 레이건의 복지정책을 거칠게 공격했다. 레이건은 “또 시작이군요(There you go again)”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이는 레이건을 친근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지난 3일(현지시간) 밋 롬니의 클로징 멘트는 어땠을까. 롬니는 “43개월째 미국 실업률이 8%를 넘었다”고 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성적을 상징하는 함축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틀 뒤 발표된 미국 실업률은 44개월 만에 8% 아래로 떨어졌다.
TV 토론을 싫어한 부시 부자
2차 TV 토론은 청중들이 던진 질문에 후보가 답하는 타운홀(Town Hall) 미팅 형식으로 진행된다. 타운홀 토론은 청중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빌 클린턴은 이를 잘 활용했다. 조지 H W 부시는 그렇지 못했다.
1992년 재선에 도전한 아버지 부시는 2차 토론에서 방청객의 질문 순간 고개를 숙여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시청자들은 부시가 ‘언제 끝나나’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클린턴은 방청객을 껴안는 등 감성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아들 부시 역시 타운홀 형식의 토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2004년엔 타운홀 토론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막판에야 참가했다. 4년 전에도 TV 토론을 토크쇼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아들 부시는 TV 토론을 싫어했지만 토론 성적은 괜찮았다. 2000년엔 앨 고어가 오히려 부시를 도왔다. 당시 TV 토론에 나선 고어는 여러 면에서 부시보다 나았다. 하지만 부시 발언 때 카메라에는 고어가 한숨을 크게 쉬는 모습이 비춰졌다. 이후 그는 거만하다는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부시가 달변은 아니었지만 소박하고 친근한 인상을 심어줬다고 평가했다.
실수 용납 않는 TV 토론
TV 토론에선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번 이슈가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다. 1976년 재선을 노리던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2차 토론에서 “소련의 동유럽 지배는 없다”고 답변했다. 냉전 당시 이런 안보의식은 문제가 됐고, 대선 판도를 흔든 이슈로 발전했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그는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무미건조한 답변 역시 금기사항이다. 1988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선 마이클 듀카키스는 사형제 반대론자였다. 진행자는 “누군가 당신 아내를 성폭행하고 살해한다면 사형에 찬성하겠는가”라는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나는 줄곧 사형제에 반대해 왔다.” 시청자의 감성을 저버린 기계적인 그의 답변은 많은 유권자들을 실망시켰다. 이후 그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