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도보순례
입력 2012-10-09 18:42
성지를 찾는 도보순례는 수행과 수난을 상징하는 엄숙한 행위이지만 돌아오는 길은 기쁨과 위안으로 가득 차게 마련이다. 꼭 그렇게 거창한 목표를 정하지는 않더라도 번잡한 일상을 잠시 떠나 유적지나 경치가 빼어난 곳을 둘러보는 것은 안식을 위한 좋은 방편이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 가양동 한강변에 있는 궁산(宮山)과 그 주변의 작은 산을 엊그저께 다녀왔다. 말이 산이지 산이라고까지 이름 붙이기 민망한 주택가 바로 뒤에 위치한 동네 산이다. 삼국시대의 성터인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와 서울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양천향교도 구경했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천자문 등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마을 뒷산이라고 허투루 볼 게 아니었다.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렸다는 소악루에 올라서는 한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누각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수년 전에 지은 것이다. 겸재의 그림을 바탕으로 그 자리에 있었음직한 곳을 골라 세웠지만 위치가 기가 막혔다. 강 건너 북한산과 북악산 안산 남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와 눈이 즐거웠다. 난지도만 없었다면 풍광이 더욱 기가 막혔을 텐데. 옥에 티였다.
이곳뿐 아니다. 서울시의 각 구에서는 자치단체별로 지역 내 명승지와 유적지를 엮어 역사문화 탐방 또는 둘레길 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지하철을 타기만 해도 각 노선마다 걷기에 좋은 길이 여러 곳 소개돼 있다. 가을철 우장산길은 노란 은행잎에 파묻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상계동 수락산 입구는 가을 단풍이 멋져 지리산 피아골이나 내장산 못지않은 산책의 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이곳은 젊은이들이 놀러갈 곳이 많지 않았던 1970년대 서울의 남녀 대학생들의 미팅장소로도 유명했던 곳이다. 당시 봄에는 창경원 벚꽃 구경, 가을에는 수락산 단풍구경이 시민들의 큰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걷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육체적인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는 않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추스르며 여유를 찾을 수 있다. 나 아닌 눈으로 나의 속을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뭘 위해 살아왔는지, 뭘 위해 살아갈지 다시 각오를 다질 수 있다. 이번 주말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 주위를 한번 걸어보면 어떨까.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