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성낙] ‘싸이 열풍’은 우리 문화의 소산

입력 2012-10-08 18:35


“일제 식민교육 세대에 주입된 콤플렉스…우리 문화의 힘이 그것을 완전 극복”

요즘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겁다. 국내외 정치 현황 또한 심란하기 그지없다. 그런 가운데 근래 싸이가 몰고 온 열풍은 뜻하지 않은 낭보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싸이 열풍을 보고 3070(1930년대 출생, 70대 연령층) 세대가 느끼는 감흥은 아마도 젊은 세대의 그것과 사뭇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든다. 3070세대에게는 싸이가 이룩한 세계 팝 음악계 제패(制覇)라는 쾌거는 우리네 마음 한구석에 알게 모르게 지니고 있던 ‘민족 콤플렉스’에 대한 한풀이 요소도 함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구미 각국에는 여러 전공분야에 한국 유학생들이 진출했으며 음악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악이 아닌 성악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에게는 왠지 넘지 못할 높은 벽 같은 것이 존재했다. 당시 한국인은 서양인에 비해 신체 구조상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성악의 결정적 요소인 폐활량(肺活量) 측면에서 동양인의 신체 구조로는 서양인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마치 불변의 원칙인 양 세간에 떠돌았다.

돌이켜보면 3070세대 중에서도 35년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 교육을 상대적으로 적게 또는 거의 받지 않은 세대다. 하지만 그네들의 스승은 예외 없이 일제 강점기에 식민 교육을 받았다. 요컨대 간접적인 식민 교육을 받은 3070세대는 초·중·고교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엽전들은 안돼”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엽전은 우리 민족성을 폄하하던 용어로 근래 젊은 세대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엽전이 성악을 전공해봤자 별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를 비롯한 대다수 한국인의 이런 편견을 일순간에 떨쳐버린 큰 ‘사건’이 있었다. 한국 성악가 최현수(崔顯守·바리톤)씨가 90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1등상을 받은 것이다. 그때 필자는 58년 미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상을 받고 귀국했을 때 뉴욕 시민이 카퍼레이드로 그를 맞았던 역사적인 사실이 떠올랐다. 한국인이 음악계의 노벨상이라는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다른 것도 아닌 성악 부문 1등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큰 놀라움이었다. 그후 국내 클래식계의 음악인들이 국제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해 이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재가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근래 클래식이 아닌 팝 음악계에서도 광풍이 불고 있다. 이른바 K팝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세계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도저히 실감할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필자는 얼마 전 주한 독일 대사관저 모임에서 독일의 세계적 미디어 재벌 베텔스만(Bertelsmann) 그룹의 리즈 몬 회장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몬 회장은 87년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의 제안을 받아들여 재능 있는 젊은 성악가를 발굴·육성하기 위해 ‘Neue Stimmen(새로운 목소리)’이라는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25년 넘게 전 세계에서 경연을 통해 새로운 젊은 유망주를 길러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대화 도중 자기도 놀란 일이 있었다며 선발심사위원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털어놓았다. 마지막 심사위원회에서 심사평이 담긴 봉투를 개봉해 보니 1등, 2등, 3등의 명예 수상자 모두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심사위원 모두가 경탄한 것은 물론이다.

근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란 노래와 특유의 말춤이 세계 팝 음악계를 휩쓸고 있다. 더욱이 미국 음악 차트 빌보드의 2위 자리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접한 요즘 싸이의 세계 팝 음악계 제패는 싸이 개인이 누리는 명예이긴 하지만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싸이 현상’은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적 소산이며,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굵은 밑줄을 친다. 그래서 더욱 자랑스럽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