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잊어선 안될 그날의 고문… 최고 화제작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
입력 2012-10-07 18:28
‘부러진 화살’보다 덜 대중적이었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선명하게 주제를 부각시켰다. 묵직했고 울림이 컸다.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화제작인 정지영(66) 감독의 ‘남영동1985’는 맘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보는 내내 관객이 고문을 당하는 듯한 시각적 불편함과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건드린다. 이런 반응은 감독이 의도했던 지점을 정확히 관통했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개봉 예정(11월 29일)이라 정치적 파장도 예상된다.
6일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 문화홀에서 열린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 ‘남영동1985’의 기자회견에서 정 감독은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고 직설화법으로 말했다.
그는 “지난해 ‘부러진 화살’이 끝나자마자 이 영화를 시작했다. 빠르게 추진해 작품이 완성됐다. 이 작품의 성격상 정치의 계절에 개봉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의 권한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사회 때 대선 후보들을 반드시 다 초청할 작정이다. 다 봤으면 좋겠다. 통합과 화해의 길로 나가자는 구호에 딱 맞는 작품이 아닌가. 이런 과거를 다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가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강조했다.
영화 ‘남영동1985’는 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1985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던 김 전 고문이 22일간 당한 끔찍한 고문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견디기 힘든 고문을 통해 없었던 사실이 실제 있었던 사실로 둔갑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극중 주인공 이름은 김근태가 아닌 김종태. 고문 피해자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 감독은 “5년 전부터 고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마침 지난해 김 고문이 돌아가신 후 수기를 보고 이 이야기를 해보자고 결심했다. 실제 인물을 다루게 된 것은 우연이고 미리 계획했던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묘사하는 고문을 보며 관객이 실제로 아파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30년 영화생활 중 가장 힘들게 찍은 작품”이라고 털어놓았다. 정 감독은 “고문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가 없었다. 촬영해보니 이렇게 힘드니까 못 찍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고문을 당하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배우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터. 김종태 역의 박원상(42)은 “배우로서 어떻게 표현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다. ‘부러진 화살’ 팀이 거의 그대로 이어서 한 거라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그 힘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고문기술자 이두한 역을 맡은 이경영(52)은 “감독이 다음 작품에 맞는 역이 있으니 같이 하자고 해 흔쾌히 받아들였는데 이걸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감독에 대한 존경과 신뢰 때문에 하게 됐다. 극중 인물에 대해서는 연민보다는 사명감을 가진 캐릭터로 접근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난 (고문하는 입장이라) 보는 내내 즐거웠다”며 “내가 상대 배우를 염려해서 고문을 살살하면 촬영이 지연될 것 같아 최대한 무자비하게 했다”며 웃었다.
박원상이 “원래 체력이 좋다. 지치지 않는 체력 하나만 갖고 연기했다”고 말하자 이경영은 “고문 받는 자체를 즐거워하고 색다른 고문 형태를 스스로 기대하는 것 같더라”고 농담을 던졌다. 정 감독은 “박원상이 없었으면 이 영화가 나올 수 없었다. 다른 연기자였으면 중간에 도망갔을 것”이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정 감독은 “우리 국민들은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고문행위가 있었는지, 그것이 어떤 고문이었는지 실체를 잘 모른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들의 희생과 아픔을 통해 있는 건데 관객과 이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과 김 전 고문의 부인인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내용이 정치적으로 민감한데다 오락성이 있는 영화가 아니다 보니 당장 극장을 잡는 것이 관건이다. 정 감독은 “끝내 결정이 안 되면 직접 배급할 생각이다. 메이저 배급사도 다 접촉했다. 그들이 아직 결정을 안했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이경영은 “무겁고 아픈 영화 대신 에로영화로 봐 달라. (고문당하느라) 발가벗은 남성을 끊임없이 터치하는 영화”라며 웃었다.
부산=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