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타협 않는 ‘영원한 아방가르드’… ‘여정 2012’ 여는 김구림 화백

입력 2012-10-07 18:14


지난 4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는 김구림(76) 화백의 작업실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창문을 뚫고 침입해 김 화백의 대표작 ‘음양(陰陽)’ 시리즈 20여점(5억원대)을 훔쳐 갔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미술계에서는 “1970∼80년대 전위예술을 주도한 작가의 작품을 훔쳤으니 나름대로 안목이 있는 도둑”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김구림이 누구야?”라는 반응이었다.

김구림. 평면회화가 주류를 이뤘던 1960년대에 플라스틱, 기계부속품, 비닐 등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한 작업을 벌였고, 1970년에는 한강 둑을 태우는 한국 최초의 ‘대지예술’을 펼쳤다. 이때 유명세를 탄 그는 잘 나가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1980년대 미국으로 훌쩍 떠나 1992년 백남준과 2인전을 여는 등 뉴욕에서 활동하다 늦게 낳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2000년 귀국했다.

이런 이력만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의 화이트블럭 갤러리에서 12월 2일까지 열리는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환등기)-김구림의 여정 2012’를 둘러보면 그가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판타스마고리아’는 마술의 한 기법으로, 파란만장한 작가의 삶과 예술을 마술적 환영처럼 보여주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지난 주말 작업실에서 만난 김 화백은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1년에 100점의 작품도 안 하는 작가는 작가로 치지도 않는다”는 그는 “더 나이 먹어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했다. 그림 도난사건에 대해 묻자 “범인이 잡혔으면 이번 전시에 그 작품을 내놓았을 텐데 아직 해결되지 않아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끊임없는 실험과 전위예술로 ‘영원한 아방가르드’라는 별명이 붙은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형 평면 작업과 마네킹 오브제를 비롯해 영상 및 설치 작품, 드로잉, 자화상 연작, 판화 등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들을 5개의 전시실을 통해 공개한다. 이 가운데 국내 최초의 실험영화인 ‘24분의 1초의 의미’는 한평생 전위성을 잃지 않은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음양’의 이치를 화면에 옮긴 1958년 작 ‘달밤(Moon Night)’, 나무 패널에 일정한 형식으로 신문지를 덧댄 1963년 작 ‘작업(Work) 8-63’, 플라스틱과 비닐을 조합해 미(美)의 규칙성을 배열한 1968년 작 ‘공간 건축(Space Construction) A-B’ 등은 작가의 실험성을 엿보게 한다. 1970년대 작업한 풍경 드로잉은 전위예술 이전에 그가 얼마나 서정적인 작가였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번 전시는 흰색의 외벽으로 순수한 미술전시를 지향하는 화이트블럭 개관 1주년 기념 초대전이다. 9일 오후 5시에는 홍신자 무용수의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20일 오후 2∼5시에는 홍경한 미술평론가(아티클 편집장)의 주재로 좌담회가 마련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드러낸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다. 관람료 5000원(031-992-44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