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거친 사랑

입력 2012-10-07 17:38


우리는 무심코 ‘싸가지’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싸가지’란 ‘싹수’의 방언인데, 어떤 일이나 사람이 ‘앞으로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를 말한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싸가지가 없다’고 하는 말은, 그 아이가 앞으로 잘될 것 같은 징조가 별로 보이지 않아서, 한마디로 ‘싹수가 노랗다’는 뜻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싸가지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고민이 생겼다. 혹시 내가 본의 아니게 우리집 아이들을 싸가지 없는 아이들로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본 것은, 싸가지 없는 아이는 부모가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한다. 오히려 너무 많이 해 줘서 생기게 되는, 인간적 사랑의 공급과잉 현상이라고 말한다. 나는 뜨끔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이들에게 거절을 잘 못한다. 그리고 무조건 사랑하고 받아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로부터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조건 헌신적으로 사랑하면 열매는 나타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이 요즘 흔들리고 있다. 아니 반성하고 있다.

독일에서 30년간 살렘 기숙학교 교장을 지낸 베른하르트 부엡은 ‘엄한 교육 우리 아이를 살린다’는 책에서, 2차대전 이후의 독일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반성한다. 히틀러 정권 이후 독일 교육계는 자유주의 교육이 확산되면서 아이들의 인권과 자유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교육관으로 일관해왔는데, 그 결과 양산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도 예절을 모르며 도통 부모의 슬하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균 36세가 되도록 부모를 떠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는 20억 유로(약 2조6000억원)를 풀어서 집세를 지원키로 했다고 한다. 자유주의 교육관은 ‘권위’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불안을 조성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보았는데, 부엡은 이 생각이야말로 가장 크고 심각한 오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청소년 문제가 이미 도를 넘어선 우리 사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양육하시는 방식은 결코 ‘공급과잉의 눈먼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좌절과 적절한 결핍을 사용하신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고난을 주실 때에도 쩨쩨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싸가지 없는 자녀를 키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집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차가운 사랑(tough love), 거친 사랑(rough love)이다.

“얘들아, 아빠가 좀 차갑게 거절해도 너무 실망하지 마! 언젠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때가 올 거야.” 이것이 남몰래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 마음의 부탁이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