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9) 권력과 영국교회
입력 2012-10-07 17:41
교회는 권력이 돼선 안되지만 종속돼서도 안된다
권력(정치)과 무관한 교회의 시대가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권력에 의해 핍박받던 시대요, 중세교회는 교회가 스스로 권력이 된 시대였다. 근세교회는 교회가 새로운 권력을 낳은 시대요, 현대교회는 교회가 권력과 갈등을 빚은 시대였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교회는 권력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교회와 권력의 관계는 메디치가, 루터,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뮌처, 히틀러, 중국 공산당,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역사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영국 교회와 권력
그것이 가장 치열하게 나타난 것은 영국 교회였다. 영국 교회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권력과의 변화무쌍한 관계를 거쳐 왔다. 그 과정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헨리 8세: 수장령 선포 및 가톨릭으로부터 분리. 에드워드 6세: 개신교 개혁. 메리 여왕: 가톨릭으로 후퇴. 엘리자베스 여왕: 영국국교 정착. 제임스 1세: 가톨릭 옹호, 왕권신수설. 찰스 1세: 청교도 박해. 찰스 1세: 처형 후 크롬웰 공화정. 찰스 2세: 영국 국교 복귀, 비 국교 박해.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윌리엄: 명예혁명, 통일령으로 개신교 종교자유화.
이렇게 변화무쌍한 역사가 또 있을까?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시작된 권력과 교회의 긴장은 1689년 통일령에 의해 모든 개신교가 자유를 얻을 때까지 그야말로 한치 앞을 볼 수 없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왕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교회가 좌지우지되었다는 점이다. 권력은 교회를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킨 개혁의 힘이었지만 동시에 교회를 핍박하는 힘이기도 했다. 도대체 청교도는 언제, 왜 일어났는가? 메이플라워호는 언제 미국을 향해 떠났는가? 영국 교회의 이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영국의 정치권력과 교회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헨리 8세, 개혁운동의 시작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리나 신조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지 않았다. 영국 교회 개혁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부터 발생했다. 그러나 헨리의 이혼 문제 때문에 영국 교회 개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의 이혼이 개혁의 계기가 되었지만 원인이 되지는 않았다.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개혁에 대한 시대적 정신이 있었고 국민적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18세 때 왕이 되면서 아버지 유언에 따라 형의 아내 캐서린과 결혼했다. 훗날 헨리는 그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해 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재판정에 서야 했다. 분노한 헨리는 토머스 크랜머의 도움으로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선포하고 반 가톨릭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수도원을 해산하고(1536, 1538) 교리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반 가톨릭 정책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1547∼1553)로 이어졌다. 크랜머의 보좌를 받은 에드워드는 가톨릭적인 예배 의식을 개혁하고 공동기도서를 통해 예전적인 영국 교회 영성의 기초를 놓았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42개 조문’은 훗날 엘리자베스 여왕 때 ‘39개 조문’으로 개조되어 오늘까지 영국 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되고 있다. 에드워드가 갑자기 사망하자 헨리와 캐서린의 딸 메리가 즉위했다. 메리는 반 개신교적이었는데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가톨릭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즉위한 지 몇 달 만에 그는 에드워드 때 쫓겨난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개혁파 지도자들을 투옥했다. 크랜머, 래티머, 리들리가 순교한 것이 이때였다. 그래서 역사는 그녀를 ‘피의 메리’라고 부른다.
청교도의 탄생
그러나 메리의 급진 정책은 영국 국민의 반감을 샀고 결과적으로 영국을 개신교 국가로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메리를 이은 엘리자베스(1558∼1603)는 종교 문제에 전념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통치 하에 영국은 강력한 개신교 국가로 등장했다. 그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으며 여세를 몰아 의회에서 수장령을 재선포(1559)하여 자신이 영국 교회의 최고 통치자임을 선언했고 통일령을 발표, 가톨릭적 규칙들을 폐지했다. 그러나 겉으로 개혁적으로 보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조치들이 오히려 미온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책은 겉으로는 개신교적이었지만 가톨릭과 루터, 칼빈주의를 절충한 혼합적인 것이었다. 그녀에게 교회는 국가적 통일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스도가 아닌 왕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한 점도 반대 진영은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청교도운동(puritanism)이다.
청교도운동은 156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혼합적 종교 정책에 반대하여 교회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미신적 찌꺼기를 더 많이 걷어내야 한다고 믿은 개신교 서클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교파운동이 아니라 다양한 교파들(장로교, 회중교, 분파적 회중교, 침례교 등)의 연합운동이었다. 이러한 개혁적 청교도운동도 또 다른 왕이 나타나자 핍박받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왕이었다가 영국 전체의 왕이 된 제임스 1세(1603∼1625)였다. 제임스는 즉위하자마자(1603) 청교도들이 탄원한 성찬 시 무릎 꿇는 것, 세례 시 십자가 긋기 등의 의식 폐지 요청을 거부하고 영국 국교 의식에 따르지 않는 자를 영국에서 추방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감독이 없으면 왕도 없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청교도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만명의 ‘언약도’가 스코틀랜드에서 순교했으며 그때부터 분리파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메이플라워호는 이때(1620) 신대륙으로 향했고 그후에도 20여년간 약 2만여명의 청교도들이 조국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넜다.
‘통일령’, 개신교의 승리
제임스 1세 서거 후 아들 찰스 1세 때 영국의 사태는 더 악화되어 비 국교도에 대한 박해 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왕의 탄압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국민과 의회는 왕과의 싸움을 선언했고 그 열매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나타났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7년 의회에서 최종 통과되었는데 루터 종교개혁 이후 125년간의 개혁적 신앙고백과 청교도적 칼빈주의 사상을 포괄했다.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되었고, 1649년부터 1658년까지 올리버 크롬웰이 호민관으로 영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즉위함으로써 왕정이 복고되고 영국 국교가 회복되었다.
리처드 박스터(1615∼1691), 존 번연(1628∼1688), 존 밀턴(1608∼1674) 등의 기독교 문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가 바로 이 즈음이다. 찰스 2세 사후(1685년) 그의 아들 제임스 2세가 잠시 계승했으나 곧 국외로 추방되고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윌리엄(William of Orange)이 명예혁명으로(1688) 즉위하자 청교도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결국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1689년 ‘통일령’에 의해 드디어 모든 개신교 교파에게 최종적인 자유가 선포되었다.
교회는 권력(정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교회는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어떤 권력과 타협하거나 종속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지배하지도 말아야 한다. 니버가 말한 대로 교회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transform) 역사 변혁의 능력이다. 영국 교회 역사가 이를 증언한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