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빈 칼럼] 기독교인이 사회참여에 나서야 하는 이유

입력 2012-10-05 17:55


한국교회는 독립된 근대국가의 수립과 민주정치의 토착화 과정에 나름대로의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공헌의 허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민족교회로서 정착하지 못하였다.’ ‘사회적 공동선(common good)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교파와 교인들의 이익만을 주장하는 이익집단에 불과하다’는 등의 부정적 평가는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하여 한국교회가 감당하여야 할 지도적 역할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21세기 한국교회는 더욱 건설적이며 적극적인 관점에서 신앙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새로운 좌표설정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먼저 신앙인은 사회참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삶의 자리를 교회와 세상의 두 공동체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왜냐하면 신앙의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 중복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인 동시에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만약 어떤 신앙인이 ‘나는 사회참여는 싫어하지만 국가와 민족은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내가 우리의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지자체 선거에 참여하였다는 사실, 매 주일 강단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가치관형성과 정의로운 정책집행을 호소하며, 눈물 흘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사회참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확인할 것은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사회참여에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역사와 사회는 결코 진공상태가 아니며, 오히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향성을 항상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만약 신앙인이 사회참여에 무관심하다면 이 사회와 역사를 강자필승과 이전투구의 장으로서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신앙인들이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만유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와(골1:16-18),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임함에 대한 기대와 신앙(마6:10) 때문이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어떤 대상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귀중히 여기며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인들의 과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순종을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순종의 폭과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얼마만큼이나 확장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개신교회가 하나님과의 계약사상을 강조하면서, 그 계약의 영역과 범위가 온 우주에 미침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여 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실현할 행위자(agents)인 청지기로서의 정체성도 재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창조로부터 부여된 ‘생육하여 다스리고 번성하라’는 문화명령(창1:28)의 수행자로서 우리의 관리책임의 영역이 우주전체에 걸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신앙이 성숙하여진다는 것은 우리의 우주관리에 대한 무한책임의식이 확실하여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풍성함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피조세계에 대한 이웃사랑을 그 질과 양에 있어서 더욱 풍성하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성숙한 신앙인은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참여는 결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사회참여는 동기와 목적뿐 아니라 방법에 있어서도 차별성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자신의 유익을 위한 힘 과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이 이웃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겸손한, 그러나 확고한 신앙적 자세와 태도 즉 영성실천으로서의 사회참여를 힘써야 할 것이다.

(장신대 교수, 기윤실공동대표·문화선교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