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김종배] 비록 앉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건강… 하나님 앞에선 이미 바로 섰습니다
입력 2012-10-05 17:44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김종배 부소장
“이제 집으로 돌아가세요. 병원 전전해야 소용없습니다. 대신 꼭 직장으로 돌아가세요. 그래야 당신 이후에 사고로 장애인이 돼 직장에 돌아올 사람도 차별 받지 않고 복직할 수 있어요.”
2년 전 교통사고로 척수장애를 입은 50세 남자 은행원에게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김종배(51) 부소장이 한 말은 ‘병원 생활을 접고 복직하라’였다. 장애인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병원을 전전하는 그에게 ‘이젠 포기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날 40분간의 짧은 대화는 이 남성에게 희망의 불씨가 됐다. 직장에 돌아가 사회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분이 다음날 밝은 얼굴로 제게 와서 ‘어제의 대화로 큰 힘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매우 중요한 결심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더 이상 병원치료로 좋아질 수 없다는 의사의 판단을 받고도 직장과 가정에 돌아가길 두려워하거든요.”
김 부소장이 척수장애인에게 자신 있게 사회 복귀를 권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고로 경추 5번 뼈를 다쳐 가슴 아래로 전신이 마비됐다. 손가락과 손목을 움직일 수 없어 수동 휠체어조차 밀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척수장애인에게 자신의 특기인 컴퓨터를 가르쳤다. 재활공학이란 개념조차 생소하던 2001년 40세의 나이로 도미, 8년간 재활공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보조기기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극적인 그의 삶 자체가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절망의 시작
연세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카이스트에서 같은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밟던 김 부소장은 전산 분야 교수가 꿈인 공학도였다. 전산과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소프트웨어의 품질관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고 유학도 계획했다. 전두환 정부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전산개발팀 연구원으로 파견될 만큼 실력도 있었다. 전도유망했던 그의 인생행로가 틀어진 건 1985년 예기치 않던 사고를 당하고부터. 친구의 옥탑방 난간에서 발을 헛디딘 게 화근이었다. 3m 높이에서 떨어진 그는 두 팔과 다리를 못 쓰는 척수장애인이 됐다. 하루아침에 전신마비가 된 아들을 본 부모의 가슴은 찢어졌다. 2남2녀의 막내인 김 부소장은 공부를 잘해 가정에서도 기대가 컸다. 꿈 많던 아들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조차 없는 현실에 부모는 좌절했다. 그럼에도 김 부소장 앞에선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내색은 거의 안 했지만 그의 부모에겐 고통의 시간이었다. 밤새 병실을 지키며 힘겨워하는 부모님을 봐야 하는 그의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갔다.
“내가 휠체어를 타는 사람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죠. 막상 척수장애인이 되고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그저 방 안에서 창을 통해 밖을 보곤 했는데 내가 ‘종신형을 받은 사형수’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모님께 짐만 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가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아침에 가족 두 사람이 그를 휠체어에 앉히고 책상 앞으로 데려다준 뒤 책을 한 권 놓아준다. 그러면 그는 신경이 살아있는 팔꿈치를 굽힌 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었다. 외출은 언감생심이었다. 그저 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조차 그의 힘으론 불가능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던 저는 뛰어내릴 수도 약을 구할 수도 없었죠. ‘아, 나는 죽음조차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비참한 형벌을 받았구나’란 생각에 더 괴로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4∼5년간 집에만 있던 그가 다시 삶의 희망을 찾게 된 계기는 한 성경구절을 접하고 나서부터다. 김 부소장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했다. 1∼2년간 힘없이 지내는 동생을 보고 큰누나가 성경을 가져다준 게 발단이 됐다.
“어릴 땐 가족이 모두 가톨릭 신자라 성당을 다녔는데 전 중학교 가선 안 나갔어요. 그런데 사고를 당하고 누님이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면서 제게 성경책을 전해줬습니다. 성경을 읽고부터 친구의 도움을 받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성경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을 발견했을 때 그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는 그의 모교인 연세대의 건학이념으로 꽤 여러 번 봐온 문구였다. 신앙이 없던 대학생 땐 그저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새롭게 다가왔다.
그동안 그는 진리가 학문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분야든 경지에 이르면 진리를 깨닫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 이해했다. 이랬던 그가 다치면서 학문의 진리는 허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믿었던 과학은 그를 도와줄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모든 학문은 절대적이지 않고 시대마다 변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게 없어요.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법칙도 다 깨지고, 사회과학도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세상엔 진리가 없고 모든 게 변한다는 걸 이때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시 한번 진리가 언급된 부분을 성경에서 찾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가 진리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그는 성경을 계속 읽어나갔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스스로 있는 자로 표현하잖아요.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고 만들어진 것에겐 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으며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그에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원동력이 됐다. 사고 이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렸던 그는 신앙을 갖고 삶의 기준을 바꿨다.
“건강할 때 천방지축으로 살다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됐으니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고 다짐했지요. 그게 사소한 일이라도 뭐든 열심히 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요.”
이후 그의 삶은 달라졌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가 있다는 확신으로 2∼3년간 성경과 찬송을 벗 삼아 지냈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1990년 국내에 개인용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부터다. 김 부소장은 컴퓨터수치제어(CNC) 프로그램을 짜기도 하고 자원봉사로 컴퓨터를 가르치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갔다. 93년엔 전동휠체어가 국내에 수입되면서 그의 활동 반경은 더욱 넓어졌다. 특히 장애인을 위해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96년부터 5년간 정보통신센터 소장으로 활동했던 한국척수장애인 수레바퀴선교회에서는 척수장애인을 위한 홈페이지를 국내 최초로 만들었다. 2000년에는 나사렛대 재활공학과에서 1년간 강의도 맡았다.
장애가 있는 내가 적임자다
재활학과에서 강의를 하던 그가 미국 유학길에 나선 것은 제대로 재활공학을 배우겠다는 본인의 결심 때문이다. 유학 배경엔 재활공학이 전공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을 가르치는 데 역부족인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국의 재활공학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당시 국내엔 재활공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재활공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 유학을 가기엔 너무 늦은 나이처럼 보였다. 스스로도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한 자신이 타국에서 공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 피츠버그대학원에서 4년 만에 석박사 통합학위과정을 졸업한데 이어 4년간 재활공학과 교수로 일했다. 박사 학위가 목표였던 그가 교수로 일한 건 연구과제에 참여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국립재활원 연구소에 합류하기 위해 200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재활공학으로 한국의 장애인 복지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기술적인 도움을 받으면 장애인도 일상생활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재활 보조기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아 이러한 사실을 일반인은 물론이고 장애인도 잘 몰라요. 안다고 해도 장비가 고가라 이를 쓸 수 있는 장애인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급형을 개발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예산 부담이 적어야 정부 지원도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으니까요.”
GOD & TECH
그의 별명은 ‘보조기기 전도사’다. 미국에서 교수로 있을 당시 일시 귀국, 한국에 2주간 머무르면서 보조기기의 중요성을 주제로 하루에 2번씩 총 20회 강의해 붙여진 별명이다. 재활공학 기술로 개발된 보조기기를 이용하면 장애인도 얼마든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다. 그는 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로 특허 16건, 시제품 14건, 상용화 2건의 성과를 올렸다.
이런 맥락에서 김 부소장은 장애의 개념을 다시 정의한다. 장애는 신체적인 문제뿐 아니라 사회·물리적 환경과 사람들의 인식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고를 당한 27년 전, 할 수 있는 게 없어 집에만 있던 그가 이제는 전동휠체어로 이동하고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개조된 차로 운전도 한다. 사회 시설 역시 많이 나아져 지하철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저상버스가 늘어났다. 활동보조인 제도도 생겨 가족의 부담이 많이 줄었다. 이 모든 요인이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를 극복하게 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GOD)으로 영적·전인적인 재활을 하고 컴퓨터·전동휠체어·보조기기(TECH)로 신체적 재활을 했다는 그는 자신의 장애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인터뷰 내내 신앙 이야기를 많이 했다.
“누군가처럼 돼야겠다는 인생의 역할모델은 따로 없어요. 사람을 닮기보다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데 인생의 의미를 두거든요. 이제 세상의 일을 성취하는 데 목적이 없어요. 내 욕심대로 달려가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앞으로도 믿음대로, 하나님 뜻대로 살 겁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