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흥우] 차칸남자, 착한남자

입력 2012-10-05 18:05


요즘 거의 빠뜨리지 않고 시청하는 드라마가 있다. 다소 긴 제목의 KBS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다. 출연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난 데다 이야기의 빠른 전개가 극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이 드라마의 원래 제목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남자’였다. 극중 뇌손상을 입은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떠올리며 일기장에 ‘차칸남자’라고 맞춤법에 어긋나게 쓰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작가는 이 모티브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목을 그렇게 달았다.

드라마가 ‘∼차칸남자’로 전파를 타자마자 논란에 휩싸였다. ‘창작의 자유’냐, ‘창작의 자유를 빙자한 한글파괴’냐는 논쟁이다. 한글학회와 시민단체들은 “한글파괴”라며 KBS에 제목 변경을 요구했고, “창작의 자유를 꺾는 구시대적 발상”이라며 한글단체와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적지 않았다. 논란은 KBS가 한글학회 등의 요구를 수용해 ‘착한남자’로 바꾸면서 잦아들었다.

창작의 자유는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신체의 자유도 국가안전보장과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일부 제한을 받을 수 있듯이 창작의 자유 또한 일정한 한계가 존재한다.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다수 국민의 상식에 반하는 예외를 인정할 경우 이 같은 한글파괴 현상이 되풀이될 개연성은 충분하다. 예외는 또 다른 예외를 부르게 마련이다. 창작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시청자의 혼란을 우려해 제목 변경을 결정한 KBS의 조치는 긍정적이다.

이번 논란은 방송과 관계된 일이 아니었다면 파장이 이렇게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방송언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중요해졌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방송에서 우리말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등 수준 이하의 방송인이 허다하다. 영어 스펠링 하나라도 틀리면 쥐구멍 찾기에 여념이 없으면서 정작 우리말, 우리글 오용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특히 TV 생활정보 프로그램의 한글파괴는 심각한 수준이다. 패션이나 가구 등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 내용은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국적불명 언어가 판을 친다. 사물이나 상황을 수식하는 형용사는 죄다 영어 아니면 외국어이고 우리말은 토씨로 쓰이는 게 고작이다. 일본어 사용에 대해서는 잘못된 용어선택이라고 면박을 주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하기도 힘든 외국어 사용에는 관대한지 모르겠다. 우리말이 엄연히 있는데 그렇다. 외국어를 섞어 쓰면 고급스럽고, 유식해 보일 것이라는 지적 허영심 때문 아닌가 싶다. 아무런 여과 없이 국적불명 언어가 마구잡이로 전파를 타고 있음에도 주요 방송사들이 이름은 다르지만 저마다 우리말 바로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난센스다.

지구적인 말춤 신드롬을 불러온 가수 싸이는 미국 TV 프로에 출연해 당당하게 우리말로 소감을 밝혔다, 지난달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기자회견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말을 하고 싶었다. 두 번의 한국말(인터뷰)은 작지만 어찌 보면 한국 가수의 꿈이다.”

그는 기자들이 ‘월드스타’로 호칭하자 ‘국제가수’로 불러 달라고 했다. 싸이, 노래 잘 부르고 춤만 잘 추는 게 아니라 한글사랑도 대단하다. 현재 지구상에는 6900여종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90%가 2050년까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우리말, 우리글을 제대로 구사하고, 올바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세종대왕께서 ‘어린 백성’들을 위해 창제하신 한글도 90%에 속할 수도 있다.

이흥우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