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배준호] ‘복지국가’ 아닌 ‘기회국가’로

입력 2012-10-04 18:39


18대 대선을 70여일 앞둔 시점에 ‘기회균등’이라는 구호가 부각되고 있다.

이 말은 1986∼87년의 경제민주화 논쟁이 벌어졌을 때 민주화의 핵심 개념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 자리를 재벌 개혁에 넘겨주었다. 한동안 수면 아래 있다가 다시 회자되고 있는 이 용어에는 복지의 근본 개념이 담겨 있다. 이는 기회균등, 공평분배, 경제적 약자에의 공적 책임성이라는 복지 3원칙 중 핵심 개념으로 노동과도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복지를 풀어 설명하면 일할 나이에 균등한 기회를 주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고, 소득과 부는 공평하게 분배 또는 재분배되도록 임금 정책과 조세 및 이전 제도를 운영하며, 그렇게 하고도 발생하는 경제적 약자는 국가의 책임으로 기본 생계를 챙겨주자는 것이다. 여기에 비춰보면 심각한 청년실업과 정규직, 비정규직 간 노노(勞勞) 갈등은 기회균등과 공평분배 원칙에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기회균등은 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다만 관련 헌법조항은 국가유공자 등 유가족 근로(32조 6항), 선거운동(116조 1항)으로 한정되어 있다.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복지도 국가의 사회복지 증진 의무, 여자·노인·청소년의 복지향상(34조 2∼4항) 정도가 언급되고 있다. 헌법 조항을 보면 우리나라의 지향점이 복지국가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외형상으로 우리는 복지국가의 모습을 갖춰오고 있다. 5대 사회보험과 국민기초생활보장, 기초노령연금,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의 제도 정비가 그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복지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중하위권이다. 그래서 내실화를 위해 대선 후보 진영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실현 가능성을 도외시한 인기영합주의 정책도 적지 않다.

복지 제도는 한번 도입하면 축소나 폐지가 어렵다. 무상보육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도입할 때 신중해야 한다. 초저출산 국가에서 보육 지원에 많은 예산을 쓰는 것은 맞는 방향이다. 하지만 사상 유례 없는 초고령 사회를 앞둔 우리로서는 복지정책의 기본 방향을 효율적인 복지로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원 계층을 압축해 필요한 만큼 지원함으로써 복지 지출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 무상보육 같은 사태를 겪지 않는다.

‘선진국은 복지국가’라는 인식 아래 김대중 정부 이후 우리는 복지국가 정비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역사가 일천해 다양한 시각이 있겠지만 이후의 지향점은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나 유럽 대륙국가의 기독교민주주의보다 캐나다, 미국, 일본, 호주를 의미하는 가미일호(加美日濠)형 자유주의체제(liberal regime)에 가깝다. 자조(自助)와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고 경제적, 사회적 약자에게 최소한의 선별적 지원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논란이 되고 있는 70% 무상보육도 이 체제의 철학에 입각하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는 초고령 사회에서도 다소간의 방향 수정으로 복지 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일자리 창출을 통한 청년실업 해소와 노동시장 통합을 이뤄 비정규직을 해소하는 것은 어엿한 복지정책의 이슈다. 일부 노동정책은 방향과 내용을 바꾸면 복지 내실화 정책이 될 수 있다. 복지 강화는 경제적 약자에 대한 공적책임 완수 못지않게 기회균등과 공평분배에서 찾아야 한다.

무조건 정부가 금쪽같은 예산으로 베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일부 선진국에서는 복지가 ‘궁핍, 나태, 타성’의 동의어로 인식되면서 ‘기회국가(opportunity state)’론이 제시되고 있다. 미국(CAP·M Browne 외), 뉴질랜드(C James)의 진보파가 지난해 4월 이후 내놓은 주장이다. 타산지석으로 주목할만하지 아니한가.

배준호 한신대 교수 글로벌협력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