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풍경-백석의 만주 유랑과 해방정국] (3) 단둥·신의주 국경의 시인
입력 2012-10-04 18:09
압록강 오가며 다진 우정… 삭막한 변방생활 버팀목
백석은 1942년 무렵 중국 안둥(安東·지금의 단둥)세관에 세리(稅吏)로 몸담고 있었지만 일은 탐탁치 않았던 모양이다. 아내(문경옥)가 생겼기 때문에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을 뿐, 세리 생활은 억지춘향이었다. 함흥 영생고보 제자 김희모의 회고는 이어진다.
“안동역에서 내린 나는 무작정 안동세관을 물어물어서 찾아갔다. 세관의 사무실에는 매우 낯익은, 그러나 지난날의 그 멋스러움과 생기발랄함이 이젠 사라져버린 한 초라한 중년의 사내가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관이라고 해도 일본인들이 웬만한 일들을 모두 맡아서 보고, 중국인들은 잡역부로 있었는데, 조선사람들은 매우 어중간한 위치에서 별반 자리지킴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듯하였다.”(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월간 ‘현대시’ 1990년 5월호)
서른을 막 넘긴 백석이 초라한 중년의 사내로 보일 만큼 초췌했다고 하니 삶의 하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때때로 압록강 철교를 통해 안둥 건너편의 신의주를 드나드는 게 적지 않은 위안이었을 것이다. 세관원이라는 신분이 통행의 자유를 보장했을 수도 있다.
당시 신의주엔 일본 시인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1909∼1990)가 거주하고 있었다. 노라타케는 작고 직전까지 백석을 비롯한 조선의 문인들을 그리워한 독특한 존재였다. 일본 혼슈 돗토리(鳥取)현에서 태어난 노리타케는 19세이던 1928년 조선에 건너와 약 17년간을 조선에서 살았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사원이 돼 신의주 소재 평북 경찰부 임시직원으로 기관지 ‘평북경종(平北警鐘)’ 편집을 담당했다.
노리타케는 개발 붐이 한창이던 신의주에 둥지를 틀고 소련·중국·조선 국경의 산과 들을 돌아다니면서 쓴 시를 묶어 1942년 경성에서 시집 ‘압록강’을 직접 제작했고, 이듬해 도쿄에서 재출간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몇 사람이 있으면 그 때 안다/ 바람이 깊은 물결과 얕은 물결, 강물을 뒤집어/ 강기슭에 하얀 먼지가 이는 압록강// 오리목과 닮아서/ 압록강(鴨綠江)이라는 이름이 붙은 강을// 5월의 물결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갔다// 중국 정크선이나 조각배 파편, 마른 풀을 띄우고/ 기슭과 기슭을 때리며 흘렀다/ 압록강에/ 노래도 없고/ 자유도 없고/ 불행도 없고/ 흐르면 멈추지 않았다/ 기슭에서 기슭으로 푸른 눈동자를 흘러가게 하고/ 바람에 고압선이 울고 있는/ 그런 강변도 있었다// 추억의 색채가/ 재방의 음악인가// 강기슭에 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청년이 있었다/ 그러한 상태가 있었다// 불쾌한 노랫소리와도/ 이제 결별하고 싶다”(‘압록강’ 전문-한성례 번역)
그는 압록강 만포진 너머 집안(輯安)의 고구려 고분을 찾아갔던 체험을 “그림물감처럼 손에 묻던 안료를 잊을 수 없고, 압록강 하류를 헤엄쳐 건너려 한 일은 잊을 수 없는 모험”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백석은 노리타케와 가까운 사이여서 그의 신의주 집도 방문해 일어로 쓴 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산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백석 ‘나 취했노라’ 전문)
노리타케는 쇼와(昭和) 시대의 대표적 시인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1900∼1964)의 문하생이었다. 미요시는 노리타케보다 앞서 1918년 조선에 들어왔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오사카 육군지방유년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에서 도망쳤다가 헌병대에 붙잡혀 징벌 차원에서 조선 북방의 국경 지역인 함북 회령의 제19공병대대에 근무하게 됐던 것이다. 당시의 체험은 시로 표출됐다.
“겨울, 강이 얼면 그들은 분노한다. 국경 감시자들은 무거운 모피 외투를 겹쳐 입었고, 두꺼운 장갑을 낀 손가락이 방아쇠 구멍에 잘 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은 분노한다. 결빙한 강은 이미 아무런 장애가 아니다. 그것은 은빛 광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밤에 맨발로 그 위를 횡단한다. 늑대처럼 그들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달린다. 길가의 전선은 잘라져 있다. 교묘하게 전선의 애자 부분을 절단해 놓았다. 그것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미 국경의 통신 연락은 두절되었다. 총성. 총성. 침입. 국경감시소. 약탈. 부녀. 그리고 날이 샌다.”(미요시 다쓰지, ‘국경’ 부분-한성례 번역)
전선을 절단한 게 조선인 항일 전사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국경의 삭막한 정경이 잘 나타나 있다. 군 복무를 마치고 귀국한 미요시가 1940년 조선을 다시 방문했을 때 노리타케는 처음으로 이 명성 높은 시인과 만나 둘이서 2개월에 걸쳐 압록강 유역에서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여러 지역을 여행한다. 앞서 노리타케는 1939년 신의주에서 경성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직원으로 근무할 때 이영준 김환기(화가) 변동림 이중섭(화가) 허진 노천명 이태준 등과 교우하고, 정지용 백석 서정주 김사량 김종환 등과 알게 된다. 그 즈음 노리타케의 ‘바람을 노래한 시집’이 경성의 인문사에서 나왔는데 이중섭이 그려준 표지 그림이 야하다는 이유로 시집을 모두 압류당하고 만다.
노리타케는 조선 땅을 떠돈 이방인이자 소외자였다는 점에서 만주를 유랑하며 단둥에 잠시 체류하고 있던 백석과도 닮은꼴이었다. 그런 그가 1940∼1942년 다시 신의주에 부임해 근무하고 있었으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백석과 교류했던 감흥은 20년 뒤에 쓴 시 ‘파( )’에 배어 있다. “파를 들고 있던 백석/ 백(白)이라는 성에 석(石)이라는 이름의 시인./ 나도 53세가 되어 파를 들어 보았네./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인 나./ 아득히 20년의 세월이 흘렀네./ 친구 백석이여, 살아 있습니까?/ 부디 살아 있기를./ 백(白)이라는 성, 석(石)이라는 이름의 조선 시인.”(‘파( )’ 전문)
노리타케는 1945년 일본 패전 후 후쿠이(福井)현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문학 살롱 ‘후쿠소분코(北文庫)’를 창설하고 ‘낭만중대(浪漫中隊)’를 발간하는 등 후쿠이 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그가 1978년 출간한 시집 제목을 백석을 연모해서 지은 ‘파’라고 붙였는데 무척 마음에 들었다며 이렇게 썼다. “조선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나는 걸음걸이까지 조선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조선 사람처럼 느긋하게 걸었다. 민족성이다. 현재 그 땅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불행한 나라다. 백석이 파를 든 모습을 본 것은 조선과 만주의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였다. 두세 번째로 유명한 그가 만주에서 파를 사서 다리를 건너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십여 알의 양파를 한쪽 손에 들었다. 국경을 넘어온 양파여. 세관원이었던 백석이여.”(수필 ‘무와 양파 이야기’)
백석과 노리타케는 압록강을 사이에 둔 국경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백석의 안둥세관 시절은 길지 않았고 문경옥과의 결혼도 파경에 이르고 만다. 적어도 백석은 1944년 안둥 생활을 작파하고 신의주에 거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의주에서 쓴 시가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로 시작되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이다. 백석은 해방을 앞두고 신의주와 고향인 평북 정주를 오가며 자신에게 밀어닥칠 변화무쌍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단둥(중국)=글·사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