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고단한 인생들에게 보내는 소박한 위로… 서유미 소설 ‘당분간 인간’
입력 2012-10-04 17:59
서유미(37·사진)의 소설집 ‘당분간 인간’(창비)은 우리는 모두 인간이지만 ‘당분간’만 겨우 ‘인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겨우 구한 새 직장과 이웃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점점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기이한 증상에 시달린다. 반대로 전임자는 갈수록 몸이 물렁해지는 증상을 앓고 있다. 증상을 감추며 버텨내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주변 상황은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급기야 두 사람의 몸은 무너져 내리고 만다.
“침대 위에는 윤곽이 흐려진 거대한 젤리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를 갖추고 있지만 사람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O는 겁이 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때, 젤리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눈으로 짐작되는 어떤 시선이 O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당분간 인간’)
젤리 인간이나 몸이 굳어가는 화석 인간은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상징한다. 그 고단함으로 인해 온몸이 한없이 물렁해져 퍼져버리거나 굳어서 산산이 부스러진다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언 눈 속에서 삽질을 몇 번만 해보면 그동안 눈의 낭만적인 표면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얼어붙은 눈은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고 위험하다. (중략) 폭설이 이 도시가 아니라 남자의 인생에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팔다리에 힘이 빠질수록 남자는 한 마리의 두더지가 되고 싶었다.”(‘스노우맨’)
‘스노우맨’은 폭설을 뚫고 출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기록적인 폭설로 온 도시가 파묻혀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재난 상황에서도 남자는 직장에서 뒤처질 것 같은 불안에 떠밀려 출근을 감행한다. 홀로 삽 한 자루를 들고 갖은 애를 쓰며 앞으로 나아가보지만 출근길은 여전히 멀고, 부장은 출근을 재촉한다. 남자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책하며 다만 막막한 삽질을 계속할 뿐이다.
서유미는 이렇듯 완강해 보이는 세계가 한순간 허물어져 내리는 멜팅 포인트(용융점)를 응시한다. 서로 다를 바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주고받는 작은 호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주는 것이 서유미의 소설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